비욘세 그룹 이후 21년만에…블랙핑크가 쓴 새 역사

블랙핑크가 K팝 걸그룹 최초로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K팝의 역사를 새로 썼다. K팝 세계에서 걸그룹이 더 이상 조연 역할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블랙핑크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4세대 걸그룹들이 보이그룹 못지않은 활약을 선보이면서 K팝 지형도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미국 빌보드는 지난 16일 발매된 블랙핑크의 정규 2집 ‘본 핑크(BORN PINK)’가 10월 1일 자로 종합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1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방탄소년단(BTS), 슈퍼엠, 스트레이 키즈 등 보이그룹이 이 차트 1위에 오른 적은 있지만 걸그룹이 정상을 차지한 건 처음이다. 블랙핑크는 영국 오피셜 앨범 차트에서도 1위에 올랐는데 팝음악 차트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미국 빌보드와 영국 오피셜 차트를 정복한 K팝 가수는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단 두 팀뿐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양국 앨범 차트 1위를 동시에 차지한 여성 그룹은 비욘세가 몸담고 있던 데스티니스 차일드 이후 21년 만이다. 블랙핑크가 K팝의 역사는 물론 걸그룹 역사도 새로 쓰고 있는 셈이다. 블랙핑크가 세계 최고의 인기 걸그룹이 된 지는 오래다. 2년 전 정규 1집 ‘디 앨범(The Album)’은 빌보드 200 차트 2위까지 올랐고, 지난해 전 세계 음악인 가운데 유튜브 구독자 수 1위에 올랐다. 톱스타 저스틴 비버, 방탄소년단 등을 모두 제친 결과다. 블랙핑크의 빌보드 1위 정복은 K팝 걸그룹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걸 알렸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2020년 블랙핑크의 ‘디 앨범’이 빌보드 200 2위에 오르기 전만 해도 이 차트 톱10에 이름을 올린 국내 가수는 방탄소년단과 NCT 127, 몬스타 X, 슈퍼엠 등 보이그룹뿐이었다. 블랙핑크의 성공 이후 K팝 걸그룹의 미국 공략이 이어졌다. 트와이스는 지난해 6월 미니 10집 ‘테이스트 오브 러브(Taste Of Love)’로 6위를 차지한 데 이어 11월 정규 3집으로 3위, 지난달 발표한 미니 11집으로 또다시 3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블랙핑크와 트와이스의 앨범을 비롯해 에스파의 미니 2집(3위), 트와이스 나연의 솔로 앨범(7위), 있지의 미니 5집(8위)까지 5장의 K팝 걸그룹 앨범이 빌보드 200 톱10을 장식했다. 걸그룹이 음원 차트 성적이나 대중성에 비해 음반 판매량이나 콘서트에선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통념도 이젠 옛말이 됐다. 2019년만 해도 서클차트 집계 기준 50만 장 이상 판매된 걸그룹의 앨범(걸그룹 멤버 솔로 앨범 포함)은 단 한 장도 없었지만 올해는 8월까지만 에스파, 있지, 트와이스, 아이브, 레드 벨벳, 나연, 뉴진스 등 6장에 이르고, 여기에 블랙핑크 앨범까지 더하면 7장이 된다. 이 중 100만 장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가 4장(블랙핑크, 에스파, 아이브, 있지)이다. 특히 8월 한 달간은 걸그룹 앨범이 판매량 차트 톱5에 4장이나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 7월 데뷔한 뉴진스는 데뷔 앨범으로 50만 장에 이르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지난해 12월 데뷔한 아이브는 각종 음원 차트 정상을 점령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3세대 대표 걸그룹인 블랙핑크와 트와이스, 레드 벨벳에 이어 4세대 걸그룹 에스파,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케플러, 엔믹스 등이 걸그룹 열풍을 이끌면서 2세대 걸그룹도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지난 8월 소녀시대가 5년 만에 새 앨범을 발표했고, 카라도 탈퇴 멤버까지 합류해 7년 만에 재결성 앨범을 내기로 했다. 사실상 해체 상태인 2NE1은 올 4월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7년 만에 공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걸그룹 시장이 최근 들어 급격히 커진 건 블랙핑크의 성공 이후 해외 시장을 겨냥한 다양한 콘셉트의 걸그룹들이 속속 등장하면서부터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성 팬덤을 의식한 ‘섹시’와 ‘청순’ 콘셉트의 내수 위주 걸그룹이 많았지만 블랙핑크의 성공 이후 국내외 여성 팬들을 공략하는 ‘걸크러시’ 콘셉트 중심으로 걸그룹 시장이 재편되면서 음반 시장에서 걸그룹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걸그룹을 이성 팬의 ‘유사 연애’를 자극하는 기획에서 동성 팬이 선망하고 동경하는 대상으로 만드는 기획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도 “2세대만 해도 걸그룹의 서사나 표현 방식이 청순하거나 섹시한 이미지, 강렬한 무대 퍼포먼스 정도로 한정적이었는데 4세대 걸그룹은 보다 다채로운 서사와 세계관, 콘셉트를 가져와 팬덤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다양한 시도는 K팝의 글로벌 시장 확대와 맞물리면서 눈에 띄는 실적을 내고 있다. K팝 걸그룹이 그간 공백 상태에 가까웠던 걸그룹에 대한 수요를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김도헌 평론가는 “미국에선 젊은 세대가 환호할 만한 걸그룹이 드문 상황인데 10대 여성의 우상이 될 만한 이미지에 뛰어난 퍼포먼스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충족시키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 대한 니즈를 블랙핑크나 에스파, 트와이스 등이 해소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걸그룹의 달라진 위상은 매출에 영향이 큰 글로벌 투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트와이스는 상반기에 북미 지역 7회 공연으로만 10만 관객 이상을 모았고, 블랙핑크는 다음 달 15, 16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북미,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로 이어지는 월드 투어에서 K팝 걸그룹 사상 최대 규모인 총 150만 명 관객을 동원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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