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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거울이라는 성찰

입력
2022.09.23 04:30
수정
2022.09.23 14:0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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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회글룬드, '거울을 든 아이'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아빠를 찾아 나선 아이가 북유럽 신화 속 생명의 나무 ‘이그드라실’이 연상되는 나무 아래서 젖은 옷을 말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거기서 뻗어나가는 먼 길, 그리고 한참을 걸은 끝에 마주하는 한 줄기 빛… 아이는 그 길의 끝에서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출판사 제공

아빠를 찾아 나선 아이가 북유럽 신화 속 생명의 나무 ‘이그드라실’이 연상되는 나무 아래서 젖은 옷을 말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거기서 뻗어나가는 먼 길, 그리고 한참을 걸은 끝에 마주하는 한 줄기 빛… 아이는 그 길의 끝에서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출판사 제공

스웨덴 그림책 작가 안나 회글룬드는 '나에 관한 연구'(우리학교 발행)로 처음 알게 되었다. 열네 살 사춘기 여자아이는 이 책의 첫 장면에서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 욕망을 과감하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많은 ‘유교걸’들이 책장을 열자마자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작가는 여자로서 자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을 단지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하는 것으로만 그리지 않고, 여자가 ‘된다’는 사회적인 맥락에 의문을 품으며 성장해가는 모습으로 그려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다음으로 소개된 '오직 토끼하고만 나눈 나의 열네 살 이야기'(우리학교)에서도 자아 정체성의 탐구가 지상과제로 다루어졌다.

'나에 관한 연구'에서 여성성을 탐색하는 도구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거울이었다. '오직 토끼하고만 나눈 나의 열네 살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게 과연 확실한 나일까 의심한다. 신작 '거울을 든 아이'(곰곰)에서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도구인 그 거울이 결국 세상을 구원하는 무기가 된다.

거울을 단 아이ㆍ안나 회글룬드ㆍ곰곰 발행ㆍ52쪽ㆍ1만4,000원

거울을 단 아이ㆍ안나 회글룬드ㆍ곰곰 발행ㆍ52쪽ㆍ1만4,000원

이야기는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로워 보이는 작은 섬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이 책의 그림을 동판화로 제작했는데, 예스럽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날카롭고 섬세한 선들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이 섬에 한 아이가 아빠와 함께 살고 있다. 섬 바깥에서 못된 거인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돌로 바꾸어버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빠는 작은 배에 온갖 무기를 싣고 떠난다. 작별 인사를 하는 아빠가 보이는 순간 불길하게도 식탁 아래로 컵이 떨어져 깨진다.

혼자 남은 아이는 날마다 망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가져다 고친다. 낡은 구두를 깁고, 깨진 컵을 접착제로 때운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며 아빠를 기다리는 동시에 창턱에 거울을 올려놓는다. 아빠의 부재를 견디면서 자신을 들여다본다. 자기 자신을 유일한 친구로 삼고 말을 걸면서 아이는 그 전까지는 몰랐던 자신의 결연한 눈빛과 표정을 보고, 문득 떠오른 지혜로운 생각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전부였던 작은 섬을 떠나겠다는 용기를 냈을 것이다.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길은 무시무시하게 캄캄하지만 아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간다. 아빠가 떠난 뒤부터 아이 주변을 맴돌던 파랑새 한 마리가 계속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독자들은 다소 안도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결국 혼자 힘으로 육지에 도착하고, 북유럽 신화 속 생명의 나무 ‘이그드라실’이 연상되는 나무 아래서 젖은 옷을 말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거기서 뻗어나가는 먼 길, 그리고 한참을 걸은 끝에 마주하는 한 줄기 빛… 아이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존재로 기꺼이, 새롭게 탄생한다.

그림책에서 거울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응시하는 무기'를 의미한다. 출판사 제공

그림책에서 거울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응시하는 무기'를 의미한다. 출판사 제공

마침내 아이는 모든 것이 다 죽어버린 황량한 땅에 도착해 무서운 거인과 맞선다.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은 신들과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는 막강한 존재이다. 신들마저 다 사라졌을 세상에서 홀로 거인과 싸우는 아이의 무기는 집을 떠날 때 가져왔던 칼과 거울, 그리고 맘씨 좋은 할머니가 주신 검은 우산뿐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소박한 무기를 어떻게 쓰면 거인을 이길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거인은 원래 자기 모습인 돌덩이로 돌아가고, 아빠를 비롯해 돌로 변했던 사람들은 제 모습을 되찾는다.

1958년생 안나 회글룬드는 1874년생 작가 엘사 베스코브가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동화 '트립, 트랍, 트롤과 거인 둠둠'에서 영감을 얻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엘사 베스코브는 세 명의 여자아이가 여러 어른의 도움을 받아 아빠를 구하는 이야기를 썼지만, 안나 회글룬드는 이름도 주어지지 않은 작고 연약한 한 아이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북유럽 신화는 신들과 거인들 사이의 전면전으로 세상 전체가 파멸하는 라그나뢰크(종말의 날)를 향해 가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남은 신들과 인간들이 결국 세상을 재건하는 이야기다. 어떤 이들이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는가. 안나 회글룬드는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거울을 쥐여준다.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성찰하는 힘이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므로.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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