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비는 아이... '가족 예능'에 가족이 멍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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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비는 아이... '가족 예능'에 가족이 멍들다

입력
2022.09.30 04:30
수정
2022.09.3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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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인격권 침해 논란]
부부 갈등 예능에 7세 아이 불안 적나라하게 노출
포경수술로 세대 소통? 공영방송의 실책
부모·자녀 촬영 동의해도 전문가가 내부 심의해야

부부 갈등 관찰 예능 프로그램 '우리 이혼했어요' 시즌2에서 아이돌그룹 출신 일라이의 아들이 아빠에게 "우리 엄마 쫒아낸 거 아니죠?"라고 묻고, 그 장면은 여과 없이 방송됐다. TV조선 방송 캡처

"근데 혹시 아빠 결혼했어요?" 아이돌그룹 유키스 출신 일라이는 7세 아들이 이렇게 묻자 "안 했어"라고 웃으며 아찔한 순간을 모면했다. 일라이는 모델 출신 지연수와 2020년 이혼했고, 그 뒤 아이는 줄곧 엄마와 따로 살고 있다. 이혼 후 오랜만에 일라이를 본 아들은 아빠를 계속 곁에 두고 싶어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다. "아빠, 그냥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라고 속마음을 꺼낸 아이는 소파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양손을 비비며 "제발"이라고 부모에게 빌었다. 지난 여름, 종합편성채널 TV조선에서 방송된 '우리 이혼했어요' 시즌2에서 나온 장면이다. "아빠, 우리 엄마 쫓아낸 거 아니죠?"라고 묻는 아이의 얼굴은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나갔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이 방송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부부 갈등 예능프로그램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에서 아이가 말다툼을 하는 부모를 향해 "싸우지 마"라고 말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MBC 방송 캡처


부모 화합 명분 뒤 위기의 아이들

TV에 쏟아지는 가족 관찰 예능 프로그램들이 아이들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다. 부부의 갈등에 불안해하는 아이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내 위기를 부각하고, 미성년의 성(性)을 함부로 다룬 사례가 최근 잇따르면서 시청자의 우려도 커지는 양상이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중요성을 망각한 방송사들이 자극적이고 구시대적인 연출로 시청률만 좇다 가족관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상파도 더는 아이들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MBC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 제작진도 영어유치원 등원을 두고 말다툼하는 부부의 쌍둥이 아이가 "싸우지 마"라고 부모를 말리고, 엄마의 팔을 잡으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최근 내보냈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부부의 갈등에 대한 몰입을 위해 제작진이 아이를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며 "부부의 문제는 어른의 문제인 만큼 그 갈등에서 아이의 모습은 모자이크를 넘어 최대한 노출하지 않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17일 방송된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에서 야구선수 출신 홍성흔의 아들 등 중학생 5명이 수술대에 누워 포경 수술을 받는 장면이 전파를 타 아동 학대 논란이 제기됐다. KBS 시청자 센터 등에 비판이 잇따르자 제작진은 "가족들이 성에 관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는 모습을 보여드리려 했던 제작 의도와 달리 시청자 여러분께 불편을 드린 점에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다. KBS 방송 캡처


'셰어런팅' 방지법 추세... 새 가족관 역행

부모와 자식과의 소통을 빌미로 아이들 성이 TV에 노골적으로 활용되는 것도 문제다. 17일 방송된 KBS2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에선 야구선수 출신 홍성흔의 아들을 포함해 중학생 5명의 포경수술 장면이 전파를 탔다. 방송에선 '세계 최초 5인 릴레이 포경수술'이란 자막이 큼지막하게 떴고 진행자의 웃음소리가 깔려 청소년의 성을 희화화했다는 시청자 항의가 빗발쳤다. 화면엔 '수술 전반에 대한 안내 후 부모님과 아이들의 동의를 받아 수술을 진행했습니다'라는 자막이 깔렸지만, 공영방송(KBS)에서 부모와 자식의 세대 간 교류의 증표로 포경 수술을 활용한다는 건 아이 즉 자식을 아직도 부모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구시대적 가족관을 답습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다. 어린이와 부모가 촬영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자라 직접 겪게 될 여러 변수까지 모두 고려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녀들 인격권 보호 위한 심의 강화 필요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홈페이지에 공지한 미디어의 어린이 인권 보호 원칙에 따르면, 어린이의 실명이나 얼굴이 공개되는 것은 해당 어린이에게 도움이 될 때만 가능하다. 국내 방송 심의 어린이·청소년 보호 규정에 '출연자의 신체 및 정서적 안정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장면을 방송해서는 안 된다'(제45조)는 내용이 있지만 너무 두루뭉술해 모자이크 처리 의무화 등 구체적인 보호 방안에 대한 적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석현 YMCA 시민중계실장은 "아이들이 방송 출연을 승낙했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며 "부모와 아이들이 모두 촬영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미성년이 출연했을 경우 방송 전 관련 전문가가 내부 심의에 참여해 아동 인격권 침해 여부 등을 점검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온라인에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담은 사진 등을 공유하는 '셰어런팅(share+parenting)'은 부모에게는 표현의 자유이지만 자녀에겐 자기결정권 침해다. 이런 가족관의 변화를 계기로 정부가 2024년까지 자녀의 정체성 확보를 골자로 한 아동·청소년 개인정보보호법 제정을 추진하는 만큼, 방송사들도 건강한 가족관 확립을 위해 가족 예능에서의 자녀들 인격권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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