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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모르는 사람들

입력
2022.11.12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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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남성의 얼굴을 한 정치, 사과는 '나약함의 반증'이라고 여겨진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한덕수(왼쪽부터) 국무총리가 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태원 참사 관련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뉴스1·뉴시스

한덕수(왼쪽부터) 국무총리가 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관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태원 참사 관련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뉴스1·뉴시스

"미안해."

이 짧은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이 말을 못 해서 갈라선 관계, 커진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연애할 때도 마음 상한 상대를 앞에 두고 "아니 그게 아니라…"는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성급하고 성의 없게 "그래 내가 미안해"라는 말을 던져 화를 돋우곤 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고 터진 구멍 앞에서 허무해한 적이 몇 번이던가. 반성하고 또 반성하지만, 여전히 사과는 어렵다. 강의에서나 친구들과 수다 떨다 언어 사용을 지적받으면 '미안'이라는 말과 함께 따라 나오는 다른 말들을 멈춰 세우기 위해 안간힘 써야 한다.

이런 나도 나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시의적절하게 사과를 잘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명백히 사과할 일이 생겨도 도망치거나 외면하기 일쑤고, 간신히 사과하더라도 정말이지 등 떠밀려 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 듣는 이에게 불쾌한 기분만 남긴다. 실로 얼마나 많은 기업과 유명인이 문제가 발생한 이후 제때, 적절히 사과하지 못하고 사람들 복장 터지게 만들었는지, 엉망진창 사과문에 담긴 억울함과 변명, 반성 없음을 꼬집은 '사과문 해석본'이 유행했다. 그런 이유로 요즘에는 '사과문 잘 쓰는 법'이라 하여, 사과문에 써서는 안 될 말과 꼭 들어가야 하는 말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양식을 베껴 쓴 사과가 제대로 된 건가 싶다가도 범죄를 저지르고 감형받고자 작성하는 반성문을 대필하는 시장까지 있다고 하니 이만하면 양반인가 싶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남자들

성교육 중 '몸 긍정 교육'이라는 게 있다. 우리 사회에서 몸을 둘러싼 정상성 강요, 꾸밈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유별난 우리 몸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긍정하고자 하는 교육이다. 운 좋게 '성문화연구소 라라(구 라라스쿨)'의 선생님이 여성청소년과 진행한 몸 긍정 교육을 곁에서 듣게 됐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체 부위를 쓰게 하자 곧잘 '다리가 굵다', '어깨가 넓다' 등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어서 다른 친구들이 우리 사회 성별 고정관념과 미적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댓글을 단다. "다리가 튼튼하니까 더 멀리까지 걸을 수 있을 거야", "어깨가 넓으면 옷 태가 살더라" 등 친구들이 남겨준 말을 서로 돌아보며 각자의 몸을 긍정하게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과연 남자 청소년들과도 이런 교육을 잘 진행할 수 있을까? 선생님께 슬쩍 물어봤더니 남자 청소년들은 자신의 약점을 잘 쓰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겠다 싶은 게, 일단 나부터도 콤플렉스를 친구들에게 밝힐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

학창시절, 우리는 언제나 친구들을 놀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만나면 반갑다고 서로 놀리는 게 안부인사였으며 혹여 누군가 이별하거나 시험에서 떨어지면 학교 앞 문방구 사장님까지 알 수 있도록 소식을 퍼다 나르는 게 놀이문화였다. 성역은 없었다. 수험생 시절 각각 '최순사', '이육사'라는 별명으로 불린 친구가 있었다. 지망했던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 탈락 직후 생긴 별명이었다.

무슨 일이 됐든, 학교에서 우는 건 있어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품으로 눈물 한 방울만 찍어도, "우냐?"에서 "야 이 자식 운다!"가 되고, 소문이 반과 전체 학년을 돌아 '마포구 감성팔이 소년의 폭풍오열 썰'로 사시사철 고통받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였다.

경쟁과 생존, 승패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잃어버린 것들

청소년기 섬세한 감정을 발달시키지 못한 대가는 꽤나 커서, 나는 한동안 슬퍼도 눈물이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약간 허세처럼 느껴지지만, 왜 울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울어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소용없을 뿐이라는 생각에 슬프고 우울한 상황에도 멋쩍게 웃고 상황과 감정을 회피하려 했다. 내 앞에서 눈물 흘리거나 감정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불편했다. 자신에게 거세된 감정, 금지된 영역을 오가는 이들을 만나는 건 당황스럽고 심지어 두려운 일이었다. 두렵다는 감정마저 숨기고자,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지?'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탓했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의도나 정도와 상관없이 모욕으로 통용됐다.)

이 정도라면 분명 주변에 불쾌해하는 이가 있을 법도 하건만 자고로 남자라면, 이 모든 과정에 초연하게 너털웃음 지을 수 있어야 했다. 부끄러워 얼굴 붉히거나 듣기 거북해하며 '예민'하게 구는 것은, '계집애' 같은 짓이므로 더 가혹한 놀림거리가 됐다. 야생도 아니었는데 약육강식이었고 혼자 자란 이 없건만 각자도생이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피라미드 같은 위계질서가 당연하며, 승리와 패배 이분법만이 자리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곧 능력의 증명이고 너저분한 말은 다 패배의 흔적이었기에 사과는 최소 불필요한 짓이거나 그저 나약함의 반증이었다. 그렇게 사과는 점차 자리를 잃었다.

참사 이후, 사과를 모르는 이들의 속 빈 애도와 본심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에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와 메모가 가득 차 있다. 서재훈 기자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에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와 메모가 가득 차 있다. 서재훈 기자

이태원 참사 앞에서 또다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무력과 절망감을 느꼈다. 해석되지 않는 일들을 마주하며, 마냥 침잠해 있기도 부끄러운 시간을 고통스럽게 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을 앞에 두고 불필요한 말을 끼얹는 사람, 슬퍼하는 이들을 맥 빠지게 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그것도 익명에 숨어 댓글에서나 떠드는 게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대놓고 그런다. 국가의 총리라는 사람은 참사 직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을 던지고 용산구청장은 핼러윈 때 이태원에 사람들이 몰린 게 '그저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며,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고 말한다.

'국가애도기간'이라는데, 도통 이 추모와 애도가 허망하게만 느껴지는 건, 최전선에서 무엇이라도 해보겠다고 안간힘 쓰던 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아파하고 사과하는데, 막상 그것을 사전에 대비했어야 할,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앉은 이들은 조금도 책임질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시기가 지나, 유례없이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모르는 이 없었음에도 그곳의 공권력은 왜 부재했나. 이것은 공권력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은, 부작위에 의한 방조로 인해 만들어진 참사다. 공권력의 참사다. 그러나 이 참사 이후, 공권력을 참칭하는 이들의 사과 없는 뻔뻔한 행보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비극 앞에 이토록 초연한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 권력자들이 '국민의 안전'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그 자리는 그저 경쟁과 생존, 노력의 대가이지 어떤 책임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본심에서 사과가 우러나오지 않는 것도 일견 당연할지 모른다.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사과는 고작해야 약자의 변명이지만, 그 자리에 오른 자신은 약자가 아니니까.

그래서 이들은 사과 대신 겨우 애도한다. 주체 없이 그저 자신의 불운함을 애도한다. 대신 참사의 현장에서 가해자를 찾는다. 아니, 어떻게든 어디서든 가해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그저 또 다른 익숙한 전쟁이고 전투이고 이겨야 하는 싸움이니까.

남성의 얼굴을 한 권력에 묻는다

이태원 참사 발생 10일째인 7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공원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무릎을 꿇은 채 추모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이태원 참사 발생 10일째인 7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공원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무릎을 꿇은 채 추모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어느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하고, 정치 권력 역시 마찬가지라서, 지금 우리 위정자들은 대체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단지 그들의 성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기존 남성적 가치관과 정치문법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이야기다. 경쟁과 효율, 개발과 발전, 승리와 패배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고 돌봄과 감정, 생태, 환경과 공존은 등한시되고 있다. 이러한 권력이라면, 참사는 이름과 모습을 바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권김현영은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것은 젠더의 렌즈로 바라보아야 할, 젠더의 문제다. 지금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국가는, 국가권력의 추모는, 애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추모 기간과 모습을 정해 다른 이들의 추모할 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전에 예방할 수는 없었는지, 미흡한 지점은 없었는지 조사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그저 권력의 안위를 염려하며 단어를 고르고 시민단체 뒷조사나 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책임(권력)을 가진 자리에 다른 누가 서더라도 이런 문제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대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치 권력이 비단 개인의 호의호식과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에 그칠 수 없기에, 끝끝내 제대로 사과할 줄 모르는 이들의 비겁 앞에서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왜 그 자리에 있는가? 정치란, 국가란,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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