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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성서의 메시지 담은 선율 "아듀, 2022"

입력
2022.11.28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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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마르쿠스 슈텐츠 지휘로 2019년 12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마르쿠스 슈텐츠 지휘로 2019년 12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12월이 코앞이다. 이때가 되면 저물어가는 해에 대한 아쉬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설렘을 달래기 위함인지 무신론자도 교회나 성당, 절을 찾고 신자도 신년운세를 본다. 공연장 풍경도 평소와는 다르다.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과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다. 올해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포함해 신화와 성서에 기초한 바로크 레퍼토리, 연주단체 무대도 눈에 띈다. 이즈음엔 무신론자도 종교적 성격을 띤 음악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 탄생 축일에 올리는 미사'(Christ’s Mass)라는 뜻이지만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캐롤을 부르며 사랑의 마음을 나눈다. 음악은 물론 서양 문화 속 깊이 뿌리내린 종교적 함의를 그대로 수용해왔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기초해 있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정신과 로마 신화에서 출발한 인간 중심, 현세 지향, 이성,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다. 헤브라이즘은 유대교로부터 확산된 기독교 사상과 문화다. 신 중심, 내세 지향, 감성, 엄격한 도덕성의 가치를 중시한다. 서양예술사는 이성과 감성, 기독교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가치관이 이동하고 충돌하면서 이어졌고 특히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문화는 신화와 성서가 중심 소재가 됐다.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은 내러티브가 없지만 신화와 성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에는 인간과 인간, 신과 인간 사이 갈등과 번민, 고통과 기쁨, 삶과 죽음, 여기에 해탈과 구원이 더해진다. 극적인 상황이 함축적으로 담긴다.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왕자 아이네아스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다. 짧은 오페라지만 디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르는 아리아 '내가 대지에 묻힐 때'는 사랑으로 인한 슬픔의 밀도가 어느 아리아보다 깊게 전달된다. 베토벤의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다. 제우스의 부당함을 거부하고 인간의 편에 섰던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저항과 인내의 상징인 영웅 이야기는 옳은 판단에 대한 가치와 감동을 전한다.

성서를 바탕으로 한 음악에서도 감동과 종교적인 경이를 경험하게 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은 교회음악의 최고봉으로 꼽는 걸작이다. 인간이 된 예수가 감내하는 고통과 아픔, 용서와 화해의 구조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 위치에 서 있는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돌아보게 한다. 헨델은 '메시아'를 포함해 '알렉산드로스', '여호수아', '솔로몬' 등 성서를 바탕으로 15편의 오라토리오를 썼다. 멘델스존은 '시편', 교향곡 2번 '찬양의 노래', 오라토리오 '엘리야', '그리스도' 등 낭만시대 작곡가로서는 누구보다 많은 종교곡을 썼다.

이밖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곡을 썼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함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내용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자연현상을 뛰어넘는 부활, 승리, 극복, 환희와 자유를 통해 인간에게 겸허함을 가르친다. 신과 인간이라는 비현실적 설정은 낯설고 먼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시대 음악의 최고 해석가로 평가받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존 엘리엇 가디너, 윌리엄 크리스티, 조르디 사발, 마크 민코프스키 등이 깊은 사유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이 음악들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완성도 높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는 그의 저서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게 무신론이 충분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황홀한 순간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은 선물에 감사할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박수갈채는 무대 위의 연주자를 위한 감사의 표시라기보다는 관객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정의 방출이다. 감사는 고요한 내면의 박수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의 존재 안에서 넘쳐흐르는 것이다. 내게 그러한 감정의 방출은 감사를 표현할 누군가가 있을 때 더 자연스럽고 더 큰 카타르시스를 준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감상을 연례 연말 행사로 생각하는 청중은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환희의 송가를 듣고 박수를 치며 하나가 되는 경험을 갖고 싶은 것은 아닐까. 종교가 없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묵은 감정을 정화하는 일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필요하기 때문이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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