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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kg 아들 죽였다" 노모 자백했지만 무죄...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입력
2022.12.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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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 노모 "소주병으로 아들 치고 수건으로 목 졸라"
"집에 엄마·오빠뿐" 딸 증언에도... 법원은 '무죄' 판단
"살해 방법·동기 인정해도... 현장 재연 못해 미심쩍어"
딸 진술도 흔들려... 경찰 재수사 착수 "국민 의혹 해소"

편집자주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건의 이면과 뒷 얘기를 '사건 플러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아들이 숨을 안 쉰다."

2020년 4월 21일 0시 53분. 76세 할머니의 침착한 목소리가 경찰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경찰과 소방은 신고를 받은 지 6분 만에 현장(할머니 딸의 집)에 도착했다. 응급처치 이후 병원으로 옮겨진 노모(老母)의 아들은 이튿날 오전 9시 세상을 떠났다.

경찰은 신고한 노모를 아들 살인범으로 체포했다. 신고 당시 "내가 죽였다"고 자백했기 때문이다. 노모는 수사기관에서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증거는 없는 상황. 검찰은 결국 노모를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 "살해 방법·동기는 상식 벗어나지 않아"

노모가 털어놓은 '살인의 기억'은 이랬다. ①냉장고에서 꺼낸 소주병을 거꾸로 집어 들고 바닥에 앉아 있는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②수건으로 아들 머리를 닦는 척하다가 목을 졸랐다. ③아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④아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걸 본 뒤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경찰에 신고했다. ⑤경찰이 올 때까지 소주병 파편을 치우고 거실 바닥을 닦았다.

노모는 살인 동기를 '비뚤어진 모정'으로 설명했다. 경찰 조사에서 "아들이 1년 전 일을 그만두고 술만 마셔 괴로웠다"고 했고 "아들이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돼 살해를 생각하던 찰나, 아들과 딸이 술주정 문제로 다투는 걸 보며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딸 역시 법정에서 '오빠가 저항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재판부 질문에 "양심이 있다면 죽고 싶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1·2심 법원도 노모의 자백을 인정했다. 173cm에 102kg 거구의 아들을 상대로 한 76세 노모의 범행, 75x45cm 크기의 수건으로 힘의 차이가 많이 나는 아들의 목을 졸라 살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재판부는 "노모가 평소 집안일을 어려움 없이 하는 등 건강 문제가 없는 반면 아들은 만취한 상태라 범행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저항 여부는 목을 졸리는 피해자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의견도 받아들였다.

살해 동기도 인정됐다. 항소심은 "정상적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져 괴로워하는 아들에 대한 연민과 딸에 대한 걱정 등으로 고민하던 찰나에 화가 나서 살해를 저질렀을 수 있다"고 밝혔다.

"못 믿겠다"는 판사들... 결국 무죄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러나 법원의 최종 판단은 무죄였다. 대법원은 노모가 범행을 재연하지 못하는 데 주목했다. 노모는 신고 9시간 뒤 범행을 재연했는데, 자신이 털어놓은 살해 수법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들의) 목을 졸라보세요"라는 경찰 요구에 "어떻게 해요"라며 반문했고, 소주병을 내리치면서도 파편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경찰 출동 당시 파편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던 범행 현장도 무죄 판단의 중요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경찰 신고 이후 소주병 파편을 치웠다'는 노모 진술에 대해 "파편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양상과 경찰 신고 뒤 딸과의 통화 등을 고려하면 3, 4분 만에 청소를 끝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모 혼자 청소를 끝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심지어 아들의 시신 상체에선 소주병 파편으로 인한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다.

딸 의심한 법원... 재수사 시작

딸의 진술도 오락가락했다. 딸은 "0시 8분쯤 집을 떠났고, 그때만 해도 오빠가 살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딸은 ①오빠와의 말싸움부터 집을 떠날 때까지의 상황과 ②집을 떠난 뒤 노모와의 전화 횟수와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재판부는 "정신적 충격이 있더라도 딸은 착오를 반복했다. 노모의 자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딸이 범행에 연루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재판부는 딸이 살해 직전에 두 자녀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수원으로 떠난 사실을 거론하며 "아들의 술주정은 늘 있던 일이지만, 딸이 평일 늦은 밤에 아이들을 데리고 수원 등에서 자고 온 적은 없었다"며 "말다툼을 넘어서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딸이 수사기관과 법정에서만 "어머니가 살해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뿐, 친척 등에게 노모 범행 관련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았던 점도 문제 삼았다. 그렇게 해당 사건은 '피해자는 있는데 범인은 없는 사건'이 돼버렸다.

인천경찰청은 올해 10월 사건을 재수사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인천 미추홀서 관계자는 "검찰로부터 방대한 기록을 받아 검토하고 있는 단계"라며 "철저한 기록 분석 등을 통해 의혹이 남지 않도록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모를 변호했던 안관주 변호사는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양형을 다퉜지만, 법원이 주도해 무죄로 결론 내렸다"며 "수사가 미진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무죄 판결 나왔을 때 노모 반응은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1심에서 무죄 받고 석방된 이후 따로 뵌 적이 없다. 법정에선 덤덤하셨던 것 같다"고 밝혔다.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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