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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가 쓴 '책을 향한 찬가'

입력
2023.03.31 11: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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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

'갈대 속의 영원'의 저자 이레네 바예호. 반디 제공

'갈대 속의 영원'의 저자 이레네 바예호. 반디 제공

동방세계를 정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후 다리우스의 왕좌에서 가장 값비싼 보물 상자를 마주한다. “여기에 얼마나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보관해야 할까?” 그가 물었다. 주변 사람들은 돈, 보석, 향수, 향신료, 전리품을 들먹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을 상자에 보관하라고 명했다. 바로 아킬레우스와 트로이 전쟁을 다룬 역사서 ‘일리아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와 함께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베개 밑에 단검을 넣고 일리아스를 품에 안은 채 잠들었다. 그는 신화 속 영웅들을 닮아가는 꿈을 꿨고 명성과 존경을 갈구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공포한 첫 번째 칙령도 “지구는 나의 것이다”였다.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리스어, 유대어, 이집트어, 이란어, 인도어로 쓰여진 책을 모아 도서관에 채웠다. 그건 세상을 소유하는 한 가지 상징적, 정신적 방식이었다. 고대 시대에도 한 권의 책은 곧 하나의 세계였다.

이레네 바예호 지음ㆍ이경민 옮김ㆍ반비 발행ㆍ557쪽ㆍ2만6,000원

이레네 바예호 지음ㆍ이경민 옮김ㆍ반비 발행ㆍ557쪽ㆍ2만6,000원

책 ‘갈대 속의 영원’은 책을 둘러싼 온갖 매혹적 이야기를 풀어놓은 에세이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매료돼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스페인 문헌학자 이레네 바예호가 썼다. '책 덕후'답게 그리스ㆍ로마 시대를 뼈대로 고대와 현대, 종교와 역사 속 책 얘기를 오가며 독자를 흥미로운 책의 세계로 안내한다. 가히 책을 사랑하는 이가 모든 것을 바쳐 쓴 책을 향한 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스토리텔링이 몹시 능수능란하다. 들어보지도 못한 로마 작가 오비디우스에서 통제와 검열의 아이러니를 꺼내는 식이다. 오비디우스는 여성을 정복하기 위한 조언을 담은 ‘사랑의 기술’을 써 인기를 누렸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외설적이고 추잡하다’며 그를 유배시키고 모든 책을 파기한다. 저자는 이를 “유럽에서 도덕적 검열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면서 “검열이 제거하고자 하는 사상을 없애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콕 짚는다. 왜냐하면 황제가 금지한 '사랑의 기술'은 손에 손을 거쳐 현대 도서관에 꽂혀 있으니까.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지루할 틈 없다. 뒤통수에 문신을 새겨 말 그대로 ‘단 하나의 비밀 문서’를 운반한 고대 전령, 차별의 시대에도 자신의 언어로 존재를 증명한 여성 작가 사포와 클레오불리나 등 매력적인 인물이 속속 등장해 눈을 사로잡는다. 시각도 균형 잡혔다. 책은 인류를 진보시키기도 했으나 퇴보시키기도 했고, 영웅과 독재자의 손에 공평하게 쥐어지기도 했다. 강박적 문학 독자인 히틀러가 쓴 자서전 ‘나의 투쟁’은 전 유럽에서 열광적으로 읽히며 나치즘을 퍼트렸다. 문화 학살자 마오쩌둥은 서점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고 혁명 자금으로 썼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은 당시 유럽에서 1,500만부가 팔리며 독일 나치정권의 바이블 역할을 했다. 신혼부부 선물이나 아이들 교재로도 많이 쓰였으며, 히틀러 사후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팔려 나갔다. 국내에도 여러 판본이 나와 있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은 당시 유럽에서 1,500만부가 팔리며 독일 나치정권의 바이블 역할을 했다. 신혼부부 선물이나 아이들 교재로도 많이 쓰였으며, 히틀러 사후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팔려 나갔다. 국내에도 여러 판본이 나와 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꼰대 같은 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지만 주섬주섬 책을 챙겨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마술을 부리는 작품. 라틴 문학의 거장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걸작’으로 칭했다. “이 걸작에는 책과 독서에 대한 사랑이 배경처럼 숨 쉬고 있다. 여러분이 다음 생에서도 읽고 있을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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