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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을 거부하는, 서발턴들의 세계 텍스트

입력
2020.11.24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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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끝> 한정현 '소녀 연예인 이보나'

편집자주

※ 한국일보문학상이 53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한정현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정현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정현의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각각 다른 시기에 발표된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읽어서는 곤란할 듯하다. 그렇다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처럼 장편에 준하는 유기성을 갖춘 ‘연작 소설’로 읽는 것도 올바른 독법은 아닌 듯하다. 발표 시기를 달리하는 여덟 편의 작품들이 긴밀하거나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다 읽은 후 남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읽게 될, 혹은 읽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느낌, 그리고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완결을 거부하는 열린 텍스트다.

감동과 여운이 길게 남는다는 뻔한 말을 에둘러 하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의 연쇄, 그런 형식을 ‘누적적’ 형식이라고 불러보자. 한 단편의 주요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는 한 연구자의 논문 대상이 되고, 한 단편의 주변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는 화자가 되고, 그리고 그들은 또 이국에서 다른 인물을 만나고, 서신을 주고받고, 인터뷰를 하거나 친구가 되고...이렇게 누적되는 이야기들에 끝은 없다.



강조해야 할 것은 그 인물들의 정체성이다. 국적과 인종과 젠더와 계급이 한 인물 안에서 혹은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교차한다. 퀴어 무속인 예술가 삼대, 공화당을 지지하고 인종적 편견을 가진 미국 백인 여성 노동자, 주한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 아시아계 흑인 여성, 4.3을 겪고 밀항한 조선적 재일 한국인...그러나 단일하고 견고한 정체성으로 묶을 수 없는 이 인물들에게도 공통점은 있다. 하나 같이 자신 몫의 발화를 수행하기 힘들었던 ‘서발턴들’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공론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들의 사연을 독자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가가 차용하고 있는 여러 발화 형식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기, 인터뷰, 서간문, 논문, 각주 등 이른바 넓은 의미에서 ‘구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가 동원된다. ‘구술적 발화’가 말하는 이의 내밀한 고통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발화 방식임을 고려한 작가의 의도가 짐작된다.

작품집을 통독한 후에도 여전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느낌의 정체는 이제 해명된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 교차하는 정체성들, 무한하게 누적 가능한 사연들, 그리고 그 사연을 받아 적은 다종의 구술적 글쓰기, 그러니까 한정현의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완결될 수 없는 ‘서발턴들의 세계텍스트’이다.

김형중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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