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말고 밀을 달라”… 흑해 열렸어도 굶주림 해소는 막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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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말고 밀을 달라”… 흑해 열렸어도 굶주림 해소는 막막

입력
2022.08.14 22:00
수정
2022.08.1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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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항로 열린 뒤 수출된 곡물은 대부분 옥수수
주식 밀 공급 절실… 유엔, 원조 위한 화물선 대여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2만6,000톤을 싣고 우크라이나 오데사항을 떠나 레바논으로 향하던 화물선 '라조니호'가 3일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 근처를 항해하고 있다. 이스탄불=로이터 연합뉴스

최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에서 흑해를 이용한 곡물 수출이 재개됐지만, 정작 굶주림에 고통받는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화물선에 실린 곡물 대부분이 주식으로 쓰이지 않는 옥수수인 데다 목적지도 식량 위기와는 관계없는 나라들인 탓이다. 상업주의가 인도주의보다 우선시됐다는 비판이 거세다.

수출 재개 곡물 대부분은 동물 사료 옥수수

13일(현지시간)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와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달 1일 우크라이나 서남부 오데사항에서 옥수수 2만6,000톤을 싣고 출항한 시에라리온 국적 화물선 ‘라조니’호는 8일 최종 목적지였던 레바논 트리폴리에 도착했지만 입항을 거부당했다.

곡물 구매자가 운송이 5개월 넘게 늦어졌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라조니호는 지중해에서 며칠간 머물다 새로운 구매자를 찾아 튀르키예(터키)와 이집트로 떠났다. 하니 부샬라 레바논식품수입협회 회장은 “레바논은 옥수수가 아니라 밀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옥수수는 동물 사료나 에탄올 같은 바이오연료 생산에 주로 쓰인다.

아시아를 제외한 대다수 국가에서 주식은 밀이다. 현재 전 세계 식량 위기는 밀 공급 부족에서 초래됐다. 밀 80%를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해 온 레바논이 대표 사례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우크라이나산 밀 수입이 끊겼고, 국가 보조금이 투입됐는데도 800~850g짜리 빵 한 봉지 값이 1만3,000레바논파운드(약 1만1,400원)로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그나마 새벽부터 몇 시간씩 줄을 서지 않으면 살 수도 없다.

지난달 22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튀르키예 △유엔은 흑해 항로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재개와 안전 보장에 합의했다. 라조니호를 시작으로 12일까지 선박 14척이 곡물 40만 톤을 싣고 우크라이나 항구를 떠났다. 그러나 수출된 곡물 대부분은 옥수수이고, 나머지는 해바라기씨와 대두였다. 목적지도 △튀르키예 △이탈리아 △영국 △아일랜드 △한국 △중국 등 심각한 기근 위기를 겪는 나라는 아니었다. 인도적 곡물 수송보다는 상업적 곡물 수송이 더 우선시됐다는 얘기다.

9일 우크라이나 즈흐리우카의 밀밭에서 농민들이 밀을 수확하고 있다. 즈흐리우카=AP 뉴시스


상업 선박들만 운항… 유엔 아프리카행 곡물선 임대

유엔은 “선사들은 상업적 활동과 절차에 따라 선박 이동을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최근 언론 브리핑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출항한 선박들이 계약서에 명시된 목적지로 향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곡물 수출입이 민간 부문에 의존하는 상황에서는 인도주의적 밀 공급이 상업적 거래에 밀려나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4자 합의에 따라 선박 감시 및 안전 검사를 위해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마련된 공동조정센터(JCC)는 어떤 곡물이 먼저 수출돼야 하는지, 어느 나라로 가야 하는지 결정하거나 조언할 권한이 전혀 없다.

우크라이나 항구가 일부 기능만 회복한 상태라 곡물 선적량을 늘리기 어렵고, 보험사들이 흑해를 지나는 선박에 대한 보험을 꺼리는 탓도 크다. 이러한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가난한 나라로 밀을 실어 나를 선박 회사도 많지 않다.

결국 유엔은 화물선을 빌렸다. 세계식량계획(WFP)과 미국 국제개발처, 여러 민간 기부자들이 자금을 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12일 오데사 인근 항구에 도착한 ‘브레이브 커맨더’호는 조만간 우크라이나산 밀 2만3,000톤을 싣고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다. 아프리카 식량 원조를 위한 화물선이 우크라이나에 입항한 건 개전 이후 6개월 만에 처음이다.

이 배에 실린 곡물은 홍해를 지나 동아프리카 지부티에 하역된 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케냐 등에 공급된다.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북동부 10개국(에티오피아·소말리아·수단·케냐 등)에선 현재 1,800만 명이 기아 위기에 놓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에는 밀 2,000만 톤이 아직 쌓여 있고, 올해도 밀 2,000만 톤을 수확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곡물선이 더욱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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