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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는 어떻게 노동계급의 '친구'가 됐나

입력
2022.09.22 17:00
수정
2022.09.22 18:1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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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 펙 부교수 '폭스 포퓰리즘'
노동 계층 언어, 상징 이용해
백인 노동자 계층에 다가가
진보 언론은 '재수 없는 엘리트'
폭스뉴스는 '노동자의 대변인' 구도 형성
진보 언론의 담론 제시 실패 꼬집기도

폭스 포퓰리즘ㆍ리스 펙 지음ㆍ회화나무 발행ㆍ476쪽ㆍ2만2,000원

폭스 포퓰리즘ㆍ리스 펙 지음ㆍ회화나무 발행ㆍ476쪽ㆍ2만2,000원

절호의 기회였다. 2008년 당선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담대한 미래가 보였다. 월스트리트가 초래한 금융위기로 탐욕스러운 기업을 향한 대중 분노가 응집됐다. 분노를 땔감으로 금융시스템을 혁파하고 복지를 강화할 기회였다. 친기업ㆍ친시장ㆍ규제완화를 십계명처럼 설파하던 공화당과 보수언론이 고해성사를 할 차례였다. 그럴싸한 생각인데 딱 하나 간과했다. 포퓰리즘(선동) 언론인 폭스뉴스의 영향력.

폭스뉴스의 인기 보수 논객들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24시간 내내 우렁차게 외쳤다. “진보 엘리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진짜 화를 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폭스뉴스 시청자다.” 분노의 초점을 기업이 아닌 정부로 돌렸고, 이 작업은 먹혔다. 백인 유권자들이 결집해 공화당은 2010년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내내 폭스뉴스와 싸웠다.

폭스뉴스 인기 프로 '오라일리 팩터'의 광고 장면. 과장되고 강렬한 어법으로 자신들의 방송이 '진실'(TRUTH)이라고 강조한다. 출판사 제공

폭스뉴스 인기 프로 '오라일리 팩터'의 광고 장면. 과장되고 강렬한 어법으로 자신들의 방송이 '진실'(TRUTH)이라고 강조한다. 출판사 제공


진보 언론 MSNBC '레이첼 매도 쇼'의 광고 장면. 진지하고 엄격한 언론인의 모습을 연출한다. 출판사 제공

진보 언론 MSNBC '레이첼 매도 쇼'의 광고 장면. 진지하고 엄격한 언론인의 모습을 연출한다. 출판사 제공

미국 진보 언론은 포퓰리즘을 혐오하고, 보수 언론은 영리하게 이용한다. 한마디로, 폭스뉴스는 미국 담론을 좌우한다. 리스 펙 뉴욕시립대(스태튼아일랜드컬리지) 미디어문화학과 부교수가 책 ‘폭스 포퓰리즘’에서 내놓은 분석이다. 폭스뉴스를 ‘언론 같지도 않다’고 욕하고 폄하하는 주장은 많다. 저자는 폭스뉴스가 노동계급을 포섭한 방식을 추적하면서, 진보 언론의 게으름을 꼬집는다.

진보 언론은 폭스뉴스를 동업자 취급도 안 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업계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CNN 간판 앵커 애런 브라운의 말이다. 안타깝지만, 진보 투톱 MSNBC와 CNN 시청률을 합쳐도 폭스뉴스를 못 따라간다. 따라가려는 생각도 없었다. MSNBC는 2011년 평일 뉴스앵커 젱크 유거를 주말 방송으로 밀어냈는데, ‘공격적 스타일’ 때문이었다. 2013년 에드 슐츠도 활기 넘치는 진행을 하다가 좌천됐다.

단순히 자극적이어서 성공했을 리 없다. 폭스뉴스는 시청자들과 소통했다. 폭스뉴스 진행자들은 노동자 계층의 언어, 상징, 문화를 적극 활용하며 친밀하게 다가간다. 백인 노동계층 저변에 깔린 ‘초고학력 진보 엘리트가 백인 노동자의 부를 빼앗아간다’는 서사도 살뜰히 이용한다. ‘세계 최고의 저널리즘’이라고 마케팅하는 뉴욕타임스가 주요 먹잇감이다. 뉴욕타임스는 ‘재수 없는 진보 엘리트 언론’, 폭스뉴스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대변인’.

'오라일리 팩터'에 출연한 컨트리음악 가수 '트레이스 애드킨스'. 애드킨스는 "예술가들 중에는 자기가 더 계몽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라며 '진보 엘리트주의'와 거리를 둔다. 출판사 제공

'오라일리 팩터'에 출연한 컨트리음악 가수 '트레이스 애드킨스'. 애드킨스는 "예술가들 중에는 자기가 더 계몽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라며 '진보 엘리트주의'와 거리를 둔다. 출판사 제공

폭스뉴스의 지향점은 뉴스 광고 영상만 봐도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린 폭스뉴스 ‘오라일리 팩터’. 쿵쿵대는 드럼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화면에 뜨는 문구. “보통 사람들을 위한 진짜 목소리. 사랑하든 미워하든 그는 최고입니다.” MSNBC의 간판 정치프로그램 ‘레이첼 매도쇼’는 어떨까. 음울한 바이올린 소리에 이어 매도가 어떤 문서에 광적으로 메모를 한 후 읊조린다. “뉴스는 동떨어진 사실들을 모아 일관성을 찾는 일이죠. 이 일을 하려면 사실에 엄격하고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폭스뉴스 진행자들은 ‘백인 노동계급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문처럼 되뇌는데, 이 서사는 중요하다. 그들이 차별받기 때문에 흑인, 이민자, 동성애자에게는 무신경해도 된다. 아울러 폭스뉴스 세계관에서는 부유층과 기업인이 노동자와 같은 편이다.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생산자’라는 점에서다. 폭스뉴스 창립자 로저 에일스의 2012년 대학 연설을 살펴보자. “저도 가난한 사람 좋아하죠. 하지만 그들에게는 일자리가 없어요. 일자리가 필요할 때마다 저는 돈 많은 사람한테 갔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일자리 주신 분들로부터 저를 갈라지게 두지 않을 겁니다.”

폭스뉴스 창업자로 2017년 사망한 로저 에일스(왼쪽). 폭스뉴스 인기 앵커였던 빌 오라일리. 연합뉴스·뉴시스

폭스뉴스 창업자로 2017년 사망한 로저 에일스(왼쪽). 폭스뉴스 인기 앵커였던 빌 오라일리. 연합뉴스·뉴시스

저자는 계급 불평등을 은폐하는 폭스뉴스에 시종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다만 “폭스가 주장하는 유토피아적이고 자유시장적인 비전은 현재 사회에 부족한 점들을 드러낸다”고 인정한다. 주류문화에서 소외됐던 백인 노동계층, 강성 기독교, 총기 소유 옹호자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어 정치적 목소리를 내게 했다. “진보 언론도 폭스뉴스를 배우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저자의 물음에 한국 언론 종사자들도 머리가 복잡해질 테다.

덧붙이자면 저자는 2017년 폭스뉴스 창업자 에일스와 인기 앵커 오라일리의 성폭력 사건도 언급한다. “수년간 강력한 정적들이 그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음에도, 정작 그들의 몰락을 야기한 힘은 폭스뉴스 내부에서 나왔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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