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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머드와 함께 버틴 '혹한의 정류장'

입력
2023.10.29 11: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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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동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6> 러시아 야나강(江)

러시아 매머드박물관에 전시된 매머드 모습.

러시아 매머드박물관에 전시된 매머드 모습.

인류는 언제 처음 북극해로 눈을 돌렸을까? 또 언제 어떻게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의 베링기아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을까? 고고학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궁금해하는 질문일 것이다. 구석기시대나 인류 진화를 연구하면 항상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끝'에 서 있는 인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동토나 사막, 그리고 고산 지대에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한 시간에 대한 궁금증이 직업 본능을 자극한다.

북극해로 흘러들어가는 야나(Yana)강 하류에도 오래된 인류의 흔적이 있다. 동토대(凍土帶)의 끝에 있는 이 유적들의 주인공들은 매머드를 따라서 북으로 이동한 현생 인류들일 것이다. 이 유적은 인류의 끈질긴 생존 욕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인류의 본능적 이동 욕구를 이해하는 실마리도 담고 있다. 신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한 정류장이었기 때문이다. 유적지에 흩어진 거대 동물들의 뼈와 석기들은 바로 그들의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야나강 유적.

야나강 유적.


야나강 유적으로

우연인지 필연인지, 야쿠티아(Yakutia) 국립 매머드박물관이 주최하는 매머드 세미나를 황우석 교수와 함께 한 적이 있다. 황 박사는 매머드를 복제하기 위해 야쿠티아, 즉 러시아 사하 공화국의 과학자들과 냉동된 매머드 사체를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매머드박물관에서는 황 교수가 그동안 이 지역에서 진행한 매머드 복제 관련 프로젝트를 볼 수 있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말 그대로 ‘매머드급’의 세기적인 연구였다. 전시된 사진들에서 매머드 복제 연구에 대한 야쿠티아 공화국의 큰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카자찌에 마을 북쪽의 야나강 풍경.

카자찌에 마을 북쪽의 야나강 풍경.

내가 참여한 탐사단에는 야쿠티아 고고학자들뿐 아니라 러시아 고생물학자, 유럽 고고학자들과 취재를 위한 프랑스 기자도 포함돼 있었다. ‘탐사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하더라도 박물관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서약까지 한 후, 비행기에 올라 야나강 중류의 우스트 쿠이가(Ust Kuyga)시로 향했다. 야쿠티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비행장이다. 이곳에서 배로 야나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운 좋게도 헬리콥터로 종착지인 강의 하구 가까이에 있는 카자치에(Kazachye) 마을로 날아갈 수 있었다. 사실 북극권 원주민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하는데 특별히 양해받았다. 헬기는 영화 터미네이터에나 등장할 법한 육중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소음에도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툰드라 평원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거대한 땅 틈새에 스며든 물이 얼어붙은, 육각형 얼음 쐐기 문양은 인간의 대지 미술이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자연의 냉혹함을 감춘 아름다움이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언덕 사이의 낮은 저지대를 따라 서 있는 키 작은 침엽수는 탐사대를 끝까지 괴롭히던 북극 모기떼와 함께 지구 생명의 끈질김을 상징하는 듯했다.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카자치에 마을 풍경.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카자치에 마을 풍경.


카자찌에 마을, 오래된 동토의 작은 ‘섬’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장난감같이 생긴 집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땅을 깊게 파기 어려운 데다 땅이 얼면 부서질 수 있어서 모두 고상 가옥의 형태였다. 다른 도시 시설도 지상에 떠 있다. 이런 혹독한 환경인 이곳에 어떻게 마을이 만들어졌을까? 이 일대에서는 북극권의 유일한 마을이란다. 마을 한쪽에 폐허가 된 큰 건물 주위로 많은 양의 기계 폐기물들이 널려 있었고, 시뻘건 녹으로 뒤덮인 폐철선(鐵船)들이 강가에 버려져 있었다. 아마도 과거 북극해에 들어오는 배들을 수리하는 조선소가 있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박물관은 현재 주민 규모를 고려하면 너무 생소하기만 하다. 그리고 박물관에 전시된 반짝이는 예쁜 구석기 유물들은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지난한 삶을 살아온 터전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야나강변 폐조선소에 버려진 철선의 모습.

야나강변 폐조선소에 버려진 철선의 모습.


경이로운 유적 그리고 극한의 오지 발굴

야나강 유적은 카자치에 마을에서 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강변에 바로 노출돼 있었다. 발굴 현장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어서 조악한 캠핑 장비로 버텨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낮에는 엄청난 모기떼가 사람 머리 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검은 헬멧을 쓴 우주인 모습을 연상케 하고, 밤이면 극한의 한기에 몸이 동태처럼 뻣뻣해진다. 고운 모래질 점토로 구성된 시커먼 퇴적층은 아침 햇살에 녹은 후에야 발굴할 수 있었다. 구석기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실감하는 곳이다. 구석기시대 인간의 손길이 닿은 작은 돌조각 하나에도 대단한 인간 승리의 장면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땅에 박혀 있던 얼음 쐐기가 녹으면서 동토층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다.

땅에 박혀 있던 얼음 쐐기가 녹으면서 동토층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다.

햇살에 퇴적층이 녹으면 무너지기 쉽기 때문에 노출된 사면을 계단식으로 발굴하고 있었다. 우리 캠프에서 조금 상류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발굴단 베이스캠프가 있었는데, 이 부근의 발굴 구덩이도 이런 좁은 계단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석기들과 함께 부서진 조각뼈들이 셀 수 없이 흩어져 있었다. 주로 큰짐승의 뼈였는데, 아쉽게도 매머드 사체나 뼈가 발견되진 않았다. 그러나 북극권에서 3만 년 전 사냥 행위를 했던 흔적이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고고학자로서도 놀라운 일이다.

매머드 헌터들이 인근 야나강물을 퍼올려 동토를 녹이고 있다.

매머드 헌터들이 인근 야나강물을 퍼올려 동토를 녹이고 있다.


매머드 헌터, 또 다른 발굴자

동행 중 저널리스트가 “매머드 헌터들을 취재하러 간다”길래 고고학 유적의 사냥터를 관찰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매머드 헌터’는 만년 빙하 속에 보존돼 있던 매머드 상아를 채굴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용어였다. 매머드 상아는 홍콩이나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어 전문 채굴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북극 지방에는 매머드 사체 수만 구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발굴 현장 바로 옆에도 야나강 강물을 모터로 빨아올려 빙하를 녹여내는 곳이 있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얼음을 녹여 만든 채굴 갱은 깊어지고, 동굴 내부는 얼음벽으로 둘러싸인다. 과거에는 얼음 속 상아가 목표였지만, 이제는 다른 동물 뼈들을 수집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특히, 만년 빙하 속에서 급속히 냉동된 사체(死體)가 발견되는 경우에는 과학자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당시 동물 세포가 온전하게 보존돼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동물이 우연히(그들에게는 재수 없이) 얼음 틈이나 구멍에 빠져 급속히 냉각된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매머드뿐 아니라 늑대나 개 등의 다른 짐승들의 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체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가 당시의 극지 환경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냉동 상태로 온전하게 발견돼 유명해진 새끼 매머드 ‘디바’의 경우에도 그렇게 발견된 것이다. 황 교수는 분명 복제 가능한 신선한 체세포가 남아 있는 매머드 사체를 기대할 것이다. 오늘날 매머드 헌터들의 꿈이기도 하다.

카자찌에 마을 박물관에 전시된 복원된 순록마차.

카자찌에 마을 박물관에 전시된 복원된 순록마차.


매머드가 모든 문제의 해결사

매머드 같은 대형 동물들의 흔적들은 인간들도 이런 극한의 환경에서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큰 덩치의 초식동물인 매머드가 살았는데, 인류가 살지 못했을 이유는 없다. 바로 ‘선사시대 매머드 헌터’들이 살았을 것이다. 매머드 고기로 배를 채우고, 뼈로는 집을 짓고, 털과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어 입었던 구석기시대 문화가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있었던 것이다. 매머드의 주식은 놀랍게도 툰드라 지역 이끼류였다. 눈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이끼류와 그 속에서 자라는 베리류의 열매, 그리고 작은 버섯이 바로 그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게 하는 에너지원이었을 것이다.

야나강 유적에서 발굴된 골각기들.

야나강 유적에서 발굴된 골각기들.


베링기아(Beringia), 인류 이동의 수수께끼

10여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 인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시기는 오늘날 고고학의 흥미로운 주제이다. 흔히 거론되는 '베링해협 유입설'은 1만6,000년 전 해수면 수위가 낮아지고 베링해의 대륙붕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매머드 사냥꾼들이 매머드 들소 등 대형 동물들을 쫓아 ‘베링 육교’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세계 최고의 과학잡지인 사이언스에 이보다 5,000년 정도 더 오래된 사람의 발자국이 미국 남부 사막의 호수 지형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이 보고돼 미국의 고고학계가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일단, 야나 유적에서 보듯 시베리아 툰드라에는 이미 거의 3만 년 전에 현생 인류가 살았다는 것이 확인됐다. 설령 아메리카 대륙 최초 원주민이 ‘2만 년 전’이라 한들, 왜 그토록 오랜 기간(최소 1만 년 이상) 베링해를 건너지 못했을까? 이들보다 훨씬 앞선 열대 지역 술라웨시(인도네시아) 인류들이 이미 4만5,000년 전에 멋진 그림들을 그리고 있었던 것과 비교되기에 더욱 의문스럽다. 미래의 매머드 고고학이 이런 수수께끼들을 명쾌하게 풀어주기를 기대한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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