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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이커플’, 주위 욕먹으며 시작… 한 달에 만 원 벌었다

입력
2023.11.16 11:00
수정
2023.11.16 17:1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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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21>크리에이터 임라라①

개그우먼 되자 ‘웃찾사’ 폐지돼 ‘백수’ 신세
휴대폰 하나 들고 시작한 ‘유튜브’로 창업까지
‘스개파’ 시리즈, 동료들에게 판을 깔아주다

2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엔조이커플’의 임라라씨를 8일 만났다. 그와 마주한 곳은 한국일보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소담스퀘어 상암’이다. 라라씨는 SBS 공채 개그맨 출신 크리에이터다. ‘엔조이커플’의 영상 화면들을 캡처해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이한호 기자

2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엔조이커플’의 임라라씨를 8일 만났다. 그와 마주한 곳은 한국일보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소담스퀘어 상암’이다. 라라씨는 SBS 공채 개그맨 출신 크리에이터다. ‘엔조이커플’의 영상 화면들을 캡처해 다중노출 기법으로 촬영했다. 이한호 기자

우리가 아는 임라라. 구독자 수 240만 명의 유튜브 채널 ‘엔조이커플’의 계정 주. 휴대폰 하나 들고 ‘0원’으로 시작해, 현재는 12명이 함께하는 크리에이터로 성장. 잇따라 방송사의 ‘개그 무대’가 없어지자 자신이 판을 벌려 동료들을 끌어 모아 ‘스트릿개그우먼파이터’ 시즌1ㆍ2를 연달아 성공시킨 기획자. 2018년엔 콘텐츠 제작 회사 ‘더새비’를 만든 사업가. 9년간 교제한 남자친구(손민수)와 결혼도, 사업도 성공해 부러움을 사는 여성. 올해 5월 올린 결혼식엔 ‘평생 최애’ 엑소(EXO)의 수호가 축가를 불러준 ‘성덕(성공한 덕후)’.

우리가 모르는 임지현. “가난에서 벗어나는 게 목표”였던 소녀.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번 생활인. 전단지 돌리기, 신문 배달, 패스트푸드점 점원까지 해본 아르바이트를 세기가 어려울 정도. 학원 강사 조교, PC방 알바, 독서실 총무를 하며 “목숨 걸고” 재수해 이화여대에 합격한 독종. 세 번 떨어진 끝에 SBS 개그맨 공채에 합격했지만 무대 위에서 느낀 건 열패감뿐. 그 시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 “무대는 성실함보다 재능이 더 빛을 발하는 곳” “나는 얼굴마저 애매하네”. 급기야 무대(‘웃찾사’)마저 폐지돼 일찍이 ‘청년 백수’에 돌입.

그 모든 실패가 쌓여 만들어진 현재가 임라라(34)다. 그는 그 실패마저 성실하게 했다. ‘뭐라도 해보자. 그럼 미래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름도 바꿨다. 인터넷과 옥편을 뒤지고 찾아서 만든 이름 ‘라라’. 그 뜻이 쌓을 라(䊨)와 열매 라(蓏)다. 이름처럼 됐다. 부모의 경제적 실패, 목표의 실패, 재능의 실패를 자양분 삼아 맺은 결실이 지금의 ‘라라랜드’이니. 그가 마음에 담고 살았던 말 ‘Everything counts(모든 건 축적된다, 즉 헛된 건 없다)’처럼.

그러므로 모두 엔조이 더 라라랜드, 웰컴 투 더 라라랜드!

[실패①] 출구라 여긴 목표에 실패하다

그는 웃음이 많고 소탈한 성격이었다. 그가 인터뷰를 하는 건 유튜브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이한호 기자

그는 웃음이 많고 소탈한 성격이었다. 그가 인터뷰를 하는 건 유튜브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이한호 기자

-원래 개그맨이 꿈이었나요.

“방송을 하고 싶어하긴 했나 봐요. 중학교 때 방송반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교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제 나름으로는 현실과 타협한 거였어요. 어른들이 말하길 방송 쪽 일은 소위 ‘빽’이나 집안의 지원이 없으면 어렵다고들 하셨죠.”

그의 아버지는 여행사를 했다. “원래도 잘 사는 건 아니었지만”, IMF 구제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큰 빚이 생겼고 살림살이엔 차압 딱지가 붙었다. 그는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게 창피해 데려오지 않았고, 친구 집에 가면 비교가 돼 속상할 것 같아 놀러 가지도 않았다”는 말로 어려웠던 가정 형편을 표현했다.

-현실의 문제를 어린 나이에 알게 됐다는 거네요.

“그래서 그때 제 목표는 오로지 ‘이 가난에서 벗어나자’였어요. 가장 빠른 길이 명문대에 가서 빨리 직업을 갖는 거라고 생각했죠. 엄마도 내내 ‘투잡’ ‘쓰리잡’을 했고, 저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알바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죠. 그런데 알바를 병행하면서 전교 1, 2등을 하기는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운동을 잘했거든요. 그럼 체육학과에 진학해서 체육교사가 되자 싶었죠.”

인생은 늘 예측불허다. 수능도 마찬가지. 하필 시험날 몸이 안 좋았다. 수능을 망쳤다.

-너무 실망했겠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처음 맛본 큰 실패였어요. 가난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지만, 공부는 내 노력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패한 거죠.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건 과욕이었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예상에 없던 대학에 두 달쯤 다니다가 자퇴했어요. 내 인생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재수를 결심했죠. 학원비는 강사 조교를 하면서, 독서실 등록비는 총무를 하면서 해결했어요. 밤에는 PC방 알바를 하면서 공부를 했고요. 독서실이 4층이었는데 옥상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서 매일 생각했죠. ‘실패하면 죽어야지.’ 지금도 담배 냄새에 매우 민감한데, 그때 PC방 알바를 하면서 평생 맡을 담배 연기를 다 맡아서 그래요. 하하.”

그렇게 죽기 살기로 공부해 그는 이화여대 체육과학과에 09학번으로 합격했다. 다니면서도 언론정보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 대학 합격을 확인한 날이었어요. 그런데 그 목표를 이뤘는데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알바로 감당이 되는 수준이었는데, 대학 학비는 그렇지 않았어요. 학자금 대출로 학기마다 500만 원씩 빚이 쌓였죠. 한 잔에 4,000~5,000원씩 하는 스타벅스 커피를 사 먹는 게 친구들한텐 당연했지만, 저는 아니었죠.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꼈어요.”

[실패②] 대학에 합격하고도... 더 힘들어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프로 생활인’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돈을 벌었다. 현실이 어렵다고 가만히 있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다. 이한호 기자

그는 어릴 때부터 ‘프로 생활인’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돈을 벌었다. 현실이 어렵다고 가만히 있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다. 이한호 기자

-그때도 알바를 많이 했다고요.

“스트레칭 강사, 수영장 라이프 가드 같은 알바를 했죠. 호텔 수영장 라이프 가드가 시급이 높았거든요. 호텔 수영장은 실내 온도를 높게 유지해야 해요. 그래서 보통 몇 시간씩은 안 하려고들 하는데 저는 참을성이 좋아서 여러 시간씩 했어요. 장학금도 받아야 하니까 밤을 새워서 공부를 했죠. 한번은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다가 수영장에서 쓰러진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의식은 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그 다음 눈을 떴는데 다행히 살아났어요. 목숨을 다시 주셨구나 싶었죠. 제2의 생이 선물처럼 온 거라고 느껴지더라고요. 그 경험 덕분에 지금의 저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일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거든요.”

-캐나다로 떠난 게 그 경험 때문인가요.

“맞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죠. 돈 300만 원을 들고 갔어요. 캐나다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처음으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면서 지냈어요. 8개월간 살았는데 그때 살이 35㎏이나 불었죠. 함께 살았던 언니가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먹을 걸 많이 사줬어요. 저는 언니를 재미있게 해주고. 하하.”

-그런데 돌아와서 개그맨 시험은 왜 봤어요.

“캐나다에서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제가 TV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막 우는 거예요. 그런 꿈을 자주 꿨어요. 그때 생각했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저거구나. 그렇다면 도전이라도 해보자’.”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2년 안에 합격을 목표로 준비했다. 보통 5년은 걸린다는데, 그는 또 한 번 성실한 자신을 믿어보기로 한 거다. 끝내 안 될 걸 대비해 교직 과정도 이수했다. 과외를 하면서 학원을 다녔다. 그때도 하루에 네 시간씩 자면서 준비했다.

-2015년 SBS 15기 개그맨 공채 경쟁률이 43대 1이었다고 하던데요. 몇 번 만에 합격했나요.

“KBS, 코미디빅리그 등을 세 번 떨어지고 난 뒤에 됐어요.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본 거였죠. 그런데 된 거예요.”

[실패③] NG, NG… 무대가 공포스러웠다

‘웃찾사’ 시절, ‘불편한 복남씨’에 출연했던 임라라(오른쪽). 유튜브 ‘스브스엔터’ 화면 캡처

‘웃찾사’ 시절, ‘불편한 복남씨’에 출연했던 임라라(오른쪽). 유튜브 ‘스브스엔터’ 화면 캡처

-개그맨 생활은 어땠나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개그맨은 웃기는 게 일이니까, 서로 웃기려고 경쟁하고, 리액션이 좋으면 그걸로 또 웃고. 돈만 잘 번다면 참 행복한 일이 개그맨이에요.”

-개그 무대에도 처음 서봤을 텐데, 어땠나요.

“저는 (개그)극단 출신이 아니라 무대 경험이 없이 개그맨이 된 경우였어요. 그러니 서툴렀죠. 한번은 무대에서 연속 2주간 NG를 냈어요. 코미디에서 NG는 해선 안 되는 실수거든요. 관객이 앞에 있으니까요. 몰입이 돼야 공감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NG를 내면 관객이 몰입할 수가 없어요. ‘아, 맞아. 저거 다 가짜였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번 NG가 나면 그 뒤부턴 관객이 웃지를 않아요. 그런데 제가 NG를 낸 거예요.”

-어떤 NG였나요.

“‘불편한 복남씨’라는 코너에서죠. 저는 웃기는 역할도 아니고 정극 연기만 하면 되는 간호사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대사를 잊어버린 거예요. 감독님이 옆에서 알려주는데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날 방송을 아예 망친 거나 마찬가지니까 동기부터 선배들한테까지 일일이 다 사과했죠. 감독님, 관객들에게는 당연하고요. 그런데 그 다음 주에 또 NG를 낸 거예요. 그때부터 ‘이제 틀리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죠. 무대에 서면 관객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공황장애 증세까지 생겼죠. 제게 무대는 공포스러운 곳이지 재미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나마 ‘웃찾사’도 폐지됐죠.

“그러니까 저는 무대에서 채 즐겨보질 못했어요. 방송 시간대가 비인기 시간대로 옮겨가기 시작하더니 2017년 5월에 아예 방송이 없어졌죠. 정말 충격이었어요.”

-무대가 자신한텐 어떤 의미인가요.

“이런 걸 느꼈죠. ‘최선을 다한다고 최대의 퀄리티가 나오진 않는 거구나. 노력이 전부인 곳은 아니구나. 이곳은 재능이 필요한 곳이구나.’ 저는 벽 보고 하루 12시간을 외워도 틀리는데, ‘뭐 저렇게까지 외우지’라고 하거나, 밤새 술 마시고도 재능이 있다면 펄펄 나는 곳이 무대였어요.”

-무대에서 확인한 건 결국 나는 재능이 없다는 거였나요.

“명확하게 재능이 없었죠. 지금도 저는 ‘개그우먼 임라라’라고 불리면 부담스러워요. 하지만 크리에이터는 천재성보다 성실함이 중요한 일이더라고요.”

-그럼 지금 자신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면.

“크리에이터죠.”

그 시절 이미 사귀기 시작한 남편 손민수씨의 사정도 비슷했다. 방송에서 고백한 적이 있듯 그 역시 공황장애로 무척 힘든 시기를 보냈다. ‘코미디빅리그’ 출신인 손씨는 무대가 있어도 그 때문에 서지 못했다. 라라씨는 “그 시절 나는 무대가 없어져버리고, 남친은 무대가 있어도 오르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두 사람 모두 무대에선 실패자였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은 또 있었다. 라라씨가 말했다. “우리는 노력은 정말 잘 했어요.”

-유튜브는 ‘웃찾사’가 없어지고 나서 시작한 건가요.

“2017년 3월부터 시작했어요. ‘웃찾사’가 폐지되기 2개월 전쯤이죠.”

-어떻게 유튜브를 할 생각을 했어요.

“개그맨이 됐지만 저도, 남친도 무명이었잖아요. ‘인생이 정말 쉽지 않네. 내 인생은 왜 이러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런 생각만 할 때였죠. 어쩌면 저도, 남친도 방송 무대 체질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때 머릿속에 유튜브가 스쳤어요. 캐나다에 갔을 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 캐나다 친구들은 이미 유튜브로 검색을 했거든요. 우리도 영상으로 검색을 하는 세상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유튜브를 시작하려고 해도 공부가 필요하잖아요.

“돈이 없을 때라 주로 교보문고에서 데이트를 했거든요. 그 위에 있는 영화관 카페에 앉아서 개그 아이디어를 짜고요. 교보문고는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영화관 카페는 영화는 못 보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자주 갔어요.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점점 유튜브 관련 책들이 늘어나더라고요. 제가 그 책들을 보면서 ‘나중엔 유튜브가 잘 될 것 같아’라고 하니까, 민수가 ‘우리도 하면 안 돼?’하더라고요.”

말하자면 ‘커플 유튜브’였다. 그때는 커플이 출연하는 유튜브 방송이 별로 없었다. 라라씨는 처음엔 반대했다. 그러다 시나브로 설득됐다. 남자친구는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었고, 자신 역시 나을 게 없었다. ‘웃찾사’는 이미 시청률이 1~2%대로 떨어져 언제 폐지돼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였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구제하는 심정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실패④] “동료 얼굴에 먹칠하는 ×”

그는 ‘1세대 유튜버’다. 지금이야 ‘피식대학’ 같은 개그 채널을 비롯해 장르 불문 유튜브가 대세지만 6년 전엔 그렇지 않았다. 이른바 ‘B급 방송’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이한호 기자

그는 ‘1세대 유튜버’다. 지금이야 ‘피식대학’ 같은 개그 채널을 비롯해 장르 불문 유튜브가 대세지만 6년 전엔 그렇지 않았다. 이른바 ‘B급 방송’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이한호 기자

-어디에서, 뭘로 찍었어요.

“민수가 살던 방 벽에 시트지를 바르고 그 앞에서 휴대폰으로 찍었어요. 편집도 독학해서 했고요. 아이템은 많았죠. 둘 다 그간 ‘까였던’ 아이디어가 많이 쌓여있으니까. 덜 자고, 덜 먹고, 더 찍었어요. 창피해도 열심히 찍어서 올렸죠.”

-아직 ‘웃찾사’를 할 때였는데 동료들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에 진짜 욕을 많이 먹었어요.”

-왜요.

“개그맨 위상 다 깎아먹는다고요. 그때는 유튜브가 마이너 매체였으니까요. 유튜브에 나오는 사람들을 B급으로 여겼고요. PD님들 중에도 ‘내가 너를 방송에 어떻게 쓰겠냐’는 분이 계셨고요. 동료들 중에서도 제 뒤통수에 대고 ‘동료들 얼굴에 먹칠하는 ×’ ‘창피한 줄도 모르는 ×’ ‘돈 벌려고 환장했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맨날 집에 가서 울었어요. 물론 응원해주는 선배들도 있었지만요.”

-그래도 계속 했으니 여기까지 온 거죠.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돈도 없고 나중엔 무대마저 없어졌으니까.”

-찾아보니 그래도 7개월 만에 구독자가 3만 명으로 늘었던데 초반부터 잘 된 거 아닌가요.

“전혀 아니었어요. 잘 돼봤자 조회수가 몇 천 건 수준이었죠. 수익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8개월 동안 들어온 돈이 8만 원이었나 그래요.”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은 안 했나요.

“그때는 방송에선 잘려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던 우리 아이디어들을 꺼내서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죠. 둘이 만들면서 깔깔 대고 웃으면서 일했으니까요. 20대라서 할 수 있는 광기와 체력으로. 돌이켜 봐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어요.”

그러다가 8개월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이른바 ‘엘리베이터 방구 몰카’다. 방귀 소리가 나는 풍선을 사용해 여자친구가 마치 배가 아파 방귀를 뀐 듯한 상황을 만들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사람들의 반응을 모은 영상이다. 물론 카메라에 잡힌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고 편집해 만들었다. 올리자 마자 유튜브 인기 영상이 됐다. 이 영상은 현재 기준 조회수가 1,448만 회에 달한다. ‘엔조이커플’의 영상을 통틀어서도 1위다.

-주위에도 안 본 사람이 거의 없던데, 어떻게 아이디어를 냈나요.

“당시 우리나라 전체 유튜브 영상 중 1위를 했죠. 민수의 아이디어였어요. 공황장애가 너무 심해져서 민수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때였거든요. 그 시기를 잘 건너도록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때론 환경을 바꾸면 나아지기도 한다는 걸 제가 캐나다의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일본 여행을 갔죠. 당시 나왔던 ‘웃찾사’ 월급 40만 원을 들고서. 그때 일본의 다이소 같은 매장에서 방귀 소리 나는 풍선을 본 거예요. 그걸 가방에 넣어뒀는데 한국에 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가 잘못 눌려서 ‘뿡’ 소리가 난 거죠. 그때 민수가 ‘이 상황을 찍어보면 재미있겠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엄청나게 반응이 좋았던 거군요.

“저는 부업으로 리포터를 하고, 민수도 알바를 할 때라 영상을 올리고 나서 반응을 바로 보지 못했어요. 밤이 돼서야 봤는데 조회수가 20만 건이 넘은 거예요. ‘와’ 했죠.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까 100만 건이 넘었더라고요.”

-8개월 만에 성공한 콘텐츠가 나온 거네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어요. 우리가 가진 필살기 콘텐츠를 막 찍고 올리기 시작했죠. 그동안 ‘이건 무조건 된다’ 싶은 아이디어를 모아뒀었거든요. 이 영상을 타고 우리 계정에 들어온 사람들이 볼 만한 다른 콘텐츠도 많아야 구독까지 할 거라고 생각했죠. 인생에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때는 잠도 자지 않고 달렸어요.”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구독자가 10만 명으로 늘었다.

[실패⑤] ‘방구 영상’도 성공만은 아니었다

그도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크리에이터 임라라를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뭘 해도 되네!” 이한호 기자

그도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크리에이터 임라라를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뭘 해도 되네!” 이한호 기자

-‘방구 영상’이 기틀을 잡게 한 거네요.

“그런데, 그 영상도 우리에겐 하나의 실패였어요.”

-그렇게 잘됐는데 왜요.

“그 영상을 보면 저희 얼굴이 잘 안 보이거든요. 하하. 지금이야 ‘엔조이커플’의 라라ㆍ민수구나 하지만 그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엘리베이터 방구 영상’은 봤는데 그게 ‘엔조이커플’의 영상인 줄은 모르는 분들이 많았던 거죠. 그 덕분에 얼굴이 나오게 찍어야 한다는 걸 배웠죠.”

-언제 유튜브에 확신이 들었나요.

“이게 내겐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다고 느낀 계기가 있어요. ‘웃찾사’를 끝내고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어떤 여자분이 버스에서 우리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지쳐있었거든요. 그 분도 퇴근길일 테니 지쳐있었을 텐데 영상을 보면서 볼이 파이게 웃고 있는 거예요. 그때 생각했죠. ‘이것도 웃음을 주는 방법이구나. 내가 무대에서는 웃기지 못했지만, 유튜브로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 계속 해봐야겠다’고.”

-‘엔조이커플’을 보면 유튜브판 종합편성채널 같은 느낌이에요. 실험 카메라, 먹방, 다이어트, 브이로그, 춤, 노래, 방송 패러디처럼 장르가 다양해요.

“실은 특별히 뛰어나게 잘하는 한 가지가 없어서예요. 그러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죠. 단 하나 잘한 게 있었다면, 사랑하는 건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유튜브 ‘엔조이커플’의 가장 큰 매력일 테다.

‘엔조이커플’은 2년 전 새로운 도전을 했다. 그들의 성장을 새삼 확인하게 된 계기다. ‘스트릿우먼파이터(스우파)’를 패러디한 방송 ‘스트릿개그우먼파이터(스개파)’를 제작한 거다. 무대가 없어진 개그우먼들이 맘껏 놀 수 있는 판을 깔았다. 유머와 페이소스가 어우러진 콘텐츠였다. 돈으로만 따지면 수천만 원 손해를 감수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실패연대기] 크리에이터 임라라②로 이어집니다. 기사는 17일 금요일 오전 11시에 공개됩니다.


김지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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