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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걸린 조현병 아버지에게 "그냥 죽으시라"고...제가 나쁜가요?

입력
2023.12.25 04:30
수정
2023.12.25 14: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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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저는 이직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30대 여성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현병이 있던 아버지는 평생을 정신과 병동에서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이혼으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존재입니다. 여동생과 저는 친척 집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독립했습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엔 늘 가난했던 가정환경, 그리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는 자신을 주변과 비교하고, 계속 후회하게 됩니다.

최근 정신과 병동에 계신 아버지가 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현병 탓에 아버지가 병원 검사 과정을 버텨 내지 못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혼한 여동생을 포함해 도움을 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검사 중간에 병원에서 뛰쳐나온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이 정도의 검사도 못 받겠으면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저도 모르게 폭언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가까스로 한 컴퓨터단층촬영(CT)에서는 아버지의 암이 이미 말기까지 진행된 것 같아 수술도 어려운 단계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병원을 나오고 싶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정신 병력으로 인해 대학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렵고,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받아줄지 의문이라 지금 계시는 정신과 병동에 임종 때까지 머무르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알려줄 부모님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지금은 남자 친구가 곁에서 많이 알려주고 가르쳐 주곤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암에 대해 "아버지가 더 이상 너와 동생에게 짐이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면서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남자 친구의 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만, 유복하게 자라 좋은 대학을 졸업한 그가 제 상황을 얼마나 이해할지는 의문입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하는 아버지가 안타까우면서도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를 자주 뵈러 가야 하는 것인지 혹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뵙지 않아야 하는 건지도요. 사실 저는 '고(高)신경성에 저(低)우호성'이고 성격유형검사(MBTI)도 ISTJ(현실주의자)라 잘 맞는 환경에서 혼자 편히 살고 싶어요. 남들에게 쓸 에너지도 별로 없고, 사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동생이 이혼한 후로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조카들을 돌보는 일도 힘이 듭니다.

이직을 위해 남자 친구에게 공부를 배우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도 화가 납니다. 공부를 하면 칙칙한 제 삶이 달라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삶이 한결 편해질 거라고 여기며 제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요. 이전에 상담을 받을 때 아버지와 동생이 있어서 죽고 싶은 날에도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답했습니다. 이제는 산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김영진(가명·32·프리랜서)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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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씨, 사연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당신의 공허함이 느껴져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의지'가 되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런 존재가요. 보통은 부모가 그 역할을 하곤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이별하고, 조현병뿐 아니라 폭력적 성향이 있어 아이가 안정적으로 의지하기 어려웠던 아버지를 가진 당신에게는 기댈 존재가 부재했습니다. 의지는커녕 일상적 관계 맺기나 감정적 교류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기에 자라면서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연에서 아버지의 몸 상태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일종의 부모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 대신 곁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그를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고 보호해 줄 기댈 만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또 상담사에게도 당신의 삶에 어떤 결정을 내려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보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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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씨에게 의존적 면모가 있다고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이런 면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죠. 인간이 독립적 존재로 성장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의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살아낼 자양분이 되는 내면의 힘을 키워 주는 건 보호자의 몫입니다. 성인이 된 후로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또 지시한 대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성장 과정에서 이런 역할을 해 줄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힘'은 지금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본인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크게는 삶의 목적에서부터 사소하게는 취미에 이르기까지 자신에 대한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당면한 아버지의 암 치료와 관련된 고민 역시 마찬가지죠. 이런 탐색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를 부모처럼 꼼꼼히 보살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영진씨는 자신을 '저우호성 고신경성'이라거나 성격유형검사(MBTI)라는 일종의 분류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이런 분류는 자신을 일정한 틀에 갇히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확실한 유형에 본인을 끼워 놓고 '이 정도면 난 나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본인을 살피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스스로를 ‘저우호성 고신경성’이라는 분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표현했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욕구는 타인을 향한 애정에 기반합니다. 당신은 성장 과정에서 친밀한 교류나 상호작용을 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인 크고 작은 갈등이나 감정적인 어려움을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는 정말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기를 원치 않아서라기보다는 서투르기 때문에 여기에 쓰이는 에너지가 많아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기 쉬운 겁니다.

동호회 등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모임에서 사소한 짧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어 보면 조금씩 익숙해질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만족감을 경험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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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감정 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일기처럼 계속 써 내려가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호작용을 했고, 그때 느낀 당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하면 됩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불편했거나 또 반대로 기대고 싶다고 바라게 된 순간은 언제였는지에 대해서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 솔직히 어떤 기분이 들어',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맞아'라는 물음을 해보면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기록하다 보면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이해하게 됩니다.

최근 들어 영진씨는 가난했고 보호자가 부재했던 성장 환경에 대한 불만이나 억울함, 다른 부모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린 조카를 만날 때마다 영진씨의 어린 시절이 문득 연상되며 그런 감정이 커지고 그래서 자주 부딪히겠지요. 물론 괴롭겠지만, 이 역시 자연스러운 감정이기에 외면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상담을 받고 계시다면 이어가시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초기엔 상담가에게도 의존을 하게 되겠지만,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독립을 목표로 차차 의존과 독립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가면 됩니다. 상담가에게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하나 물어보는 것보다는 당신의 주장과 생각, 감정을 자꾸 표현해 보는 연습을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남자 친구가 가까운 존재인 만큼 생각이 다를 때는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는 연습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믿고 의지하는 상대와의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에 권유를 거절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진씨가 그의 조언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속으로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불편함이나 두려움을 감수하는 선택을 조금씩 해 가며 본인의 주관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영진씨의 인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인 지금부터는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존중해 주는 부모 역할을 본인에게 하면서요. 그렇게 진정한 독립을 경험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는 영진씨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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