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양세형 “눈 뜨면 불행… 다음 생을 기대하려던 순간도 있었다”

입력
2023.12.29 11:00
15면
0 0

[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24>코미디언 양세형②

‘죽을 생각도 했는데… 이제 직진’ 결심
“시 쓰면 행복이 만 배로… 내 치료법”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노 부러진다”

코미디언 양세형씨를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의 앞에 있는 책이 최근 출간한 시집 ‘별의 길’이다. 그간 써온 시 88편을 추려 엮었다. 최주연 기자

코미디언 양세형씨를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그의 앞에 있는 책이 최근 출간한 시집 ‘별의 길’이다. 그간 써온 시 88편을 추려 엮었다. 최주연 기자

양세형(38)씨가 시집 ‘별의 길’을 내기 전이다. 출판사 ‘이야기장수’의 이연실 대표는 올해 6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날 두 가지에 놀랐다.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나온 그가 랩톱 컴퓨터를 열어 보여준 시가 150여 편이나 됐다. 게다가 좋았다. ‘만약 시들이 영 아니라면 어떻게 말을 하나.’ 이 대표의 마음 한구석엔 고민도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시들을 보고선 이 대표는 말했다. “시집으로 내시죠.” 이번에 놀란 쪽은 양세형씨였다. 그는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신중한 출발이었다.

[실패⑤] 시는 나의 심리 치료법

그는 어릴 때부터 보이는 곳에 짧은 글쓰기를 즐겨 했다.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계기다. 최주연 기자

그는 어릴 때부터 보이는 곳에 짧은 글쓰기를 즐겨 했다. 글이 주는 치유의 힘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계기다. 최주연 기자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처음부터 시라고 생각하고 쓴 건 아니에요. 거창하게 늘여놓지 않은 글을 쓰면 나중에 보기에도 좋으니까 쓰기 시작했어요. 손으로 쓰거나, 스마트폰에 적어뒀죠. 1년쯤 된 것 같아요.”

-“시집에 실은 작품은 대부분 웃기기보단 슬픈 이야기다. 모든 것이 꼬일 때,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을 때 주로 썼다”고 한 적이 있어요.

“머릿속에 맴도는 감정을 바깥으로 끄집어낸 다음에 보면 인정을 하게 되더라고요. 마음도 풀리고요. 그러니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좋은 감정이 들 때 ‘뭐가 좋았지’ 곱씹으면서 쓰기 시작하죠. 바람이 좋았고, 햇빛이 좋았고… 그럼 그걸 문장으로 써봐요. 그런 뒤, 행도 바꿔보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글로 표현하면 ‘아, 내가 이런 기분이었구나’라고 정리가 돼요. 그럼 행복이 훨씬 더 커지는 걸 경험했죠.”

-그래서 시 쓰기를 ‘놀이’이자 ‘멘털 치유법’이라고 표현한 거였군요.

“맞아요. 제가 예전엔 게임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시는 그 어떤 게임보다 재미있어요. 그래서 제발 한번 써보시라고 많이 권해요.”

그의 시는 단순하면서도 삶의 단상이 담겨 있어 곱씹게 된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들.

‘몰랐다/너와 난 먹는 물이 다른 존재였다’(시 ‘다름’ 중)

‘너도 나도 뒤돌면/뭣도 없더라’(시 ‘어차피 봄’ 중)

‘고집스럽게 버티던/겨울에 쓰라린 발끝은/굳건한 삶이 되었다//한숨을 토해내고/눈감고 꿈꿨더니/해가 떠 있더라’(시 ‘우리’ 중)

-삶의 양면은 결국 하나라는 진리가 담긴 시들이 많더라고요. 이런 건 어떻게 깨달았나요.

“대세라고 불릴 때도 있었고, 꺾일 때도 있었어요. 사람들 기대에 부응할 때도, 그렇지 못할 때도, 돈을 많이 벌 때도, 못 벌 때도 있었죠. 멀리서 보니까 올라갈수록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둡고 추울 때 작은 빛이 더 아늑하고 화려하게 보이잖아요.”

-시 ‘봄날의 산행’은 동시 같아요.

“그 친구 사진이 여기 있어요!”

그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앨범을 뒤적였다. 그가 내민 사진 속에는 낙엽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작고 여린 풀잎이 담겨 있었다. 그는 시에서 “그 친구”를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산길에서 발견한 작고 푸른 잎. 시 ‘봄날의 산행’의 소재가 됐다. 그가 당시 찍은 사진이다. 양세형 제공

그가 산길에서 발견한 작고 푸른 잎. 시 ‘봄날의 산행’의 소재가 됐다. 그가 당시 찍은 사진이다. 양세형 제공

'신발끈이 풀려/고개를 숙이니//낙엽 사이 피어나는/푸릇푸릇 작은 생명//요 녀석 네가/내 신발끈을 풀었구나//너의 어여쁜 두 잎을/보여주고 싶었구나//낙엽 이불 속에서/얼마나 설레었을까//어떤 꽃을 피울지는 모르겠지만/참으로 향기롭구나'(시 ‘봄날의 산행’ 전문)

-표현이 천진해요.

“삭막해 보이는 낙엽 사이에 올라온 이 친구가 너무 귀여운 거예요. 마침 거기서 신발끈이 풀려서 묶으려고 고개를 숙였거든요. 얘가 ‘나 이렇게 꿋꿋하게 폈어요. 저 좀 바라봐 주세요’ 자랑하는 듯했죠.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르지만 되게 향기로울 것 같더라고요, 이런 친구라면.”

[실패⑥] 죽으려고까지 했는데, 이제 ‘노 빠꾸’다

그에게도 생과 사의 선을 넘으려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깨달음을 그는 시에 담았다. 최주연 기자

그에게도 생과 사의 선을 넘으려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깨달음을 그는 시에 담았다. 최주연 기자

-시를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은 안 나는데 언젠가부터 너무너무 힘들 때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라는 캐릭터의 주인이 다시 열심히 일해서 다음엔 행복을 넣어주겠지’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주체를 바꿨죠.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일을 하면 돈 같은 걸 받는데, 그걸로 아이템을 사서 넣어주는 거라고. 올해 생일에 저녁을 먹는데 말짱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와, 아빠가 내 생일이라고 비 아이템을 써줬구나.’ 일이 좀 안 풀려도 ‘지금 내가 너무 들떠 있어서 정신 차리라고 이런 아이템을 써서 나를 바로잡아주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고요.”

그의 말 중 “너무너무 힘들 때”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인기 비수기’라고는 없었을 것 같은 그에게도 삶의 고비가 있었던 걸까.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예요.

“이 시집에 실린 마지막 시 ‘1909호’에 담긴 시절이에요. 그때 살던 집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죠. 실제 오피스텔 여닫이 창문을 열고 한 발을 빼기까지 했어요. 팔이 창틀 모서리에 긁히는 바람에 멈췄지만. ‘이 정도 상처에도 아파서 질질 짜는 애가 어떻게 떨어지겠냐’ 싶더라고요.”

-양세형씨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왜 그랬나요.

“전역한 뒤였어요. ‘웃찾사’(시즌1)는 폐지됐고, 섭외 들어오는 프로도 없었어요. 그 전에 벌었던 돈은 다 부모님을 드렸거든요. 그러니 돈도 없고 희망도 없었죠. 사람들이 다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모든 안 좋은 상황이 다 겹쳤던 때죠. 자기 직전까지 불행하다가 잠을 자면 잊었어요. 다시 눈을 뜨면 불행해지고요. 그러니 ‘계속 잠을 자면 안 불행하지 않을까, 다음 생을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죠.”

-떨어지려다 실패한 뒤에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집을 정리했어요. 원래 제가 집을 정말 깔끔하게 해두고 살거든요. 그런데 그땐 ‘어차피 죽을 건데’ 이러면서 집을 방치했었죠. 집을 치우면서 ‘그래, 내가 이런 생각까지 했단 말이지. 그럼 이제 ‘빠꾸’는 없어. 내일부터 무조건 직진이다’라고 마음먹었어요.”

-그러곤 어떻게 했나요.

“밤을 새워서 아이디어를 짰어요. 초창기처럼요. 그러다 보니 코너가 잘 나왔고, ‘코미디빅리그’에도 들어갔죠. 당시엔 1등 하면 상금을 5,000만 원(정규리그), 1억 원(챔피언스리그)씩 줬거든요. 그때 우승을 몇 번 하면서 (정상권으로) 올라갔죠.”

기록을 찾아보니 그는 당시 ‘코빅’ 시즌2에선 코너 ‘게임 폐인’으로 정규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시즌3에서도 ‘사생팬’ ’양아치’ 등의 코너로 정규리그 준우승을, 챔피언스리그에선 온라인투표 1위(미투데이상)를 했다.

-죽으려고 했던 때를 떠올리면 어떤가요.

“그 뒤로 그곳에 두어 번 갔거든요. 그때 생각했죠. ‘잊지 말자, 절대 잊지 말자.’”

-어떤 의미예요.

“여기서 느꼈던 것들, 당했던 일들을 잊지 말자고요.”

-어떤 일들을 당했나요.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일이 잘 안 풀리니 떠나간 사람들, 제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지레 연락을 피한 사람들, 심지어 제가 과거에 큰돈을 빌려줬는데도 연락을 끊은 사람들이 있었죠. 제가 힘든 걸 알면서도요. 어쨌든 그때 실제 죽으려고 시도한 거잖아요. 그때를 떠올리면 마치 과거의 나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분이에요.”

‘별의 길’에 실린 마지막 시 ‘1909호’에 그런 서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곳은 그러니 그가 다시 살아나온 곳, 그에게 무서울 것 없는 생의 의지를 심어준 곳이다. 그 시는 그래서 이렇게 맺어진다. ‘아픔을 닦으면 내일은 웃음이다.’

그는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공표’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버리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실행하게 되므로. 시집을 출간하려는 구상도 올해 1월 SBS 라디오 ‘조정식의 펀펀투데이’에 나갔다가 처음 말했다. 최주연 기자

그는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공표’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버리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실행하게 되므로. 시집을 출간하려는 구상도 올해 1월 SBS 라디오 ‘조정식의 펀펀투데이’에 나갔다가 처음 말했다. 최주연 기자

-겪어보니 돈이 없다는 건 어떤 일이던가요.

“한창 일이 없을 때 ‘도전 1,000곡’이라는 프로에 나가게 됐어요. 1등을 하면 로봇청소기를 주더라고요. 저는 나갈 때마다 무조건 1등을 해야 했어요. 그래야 상품을 중고시장에 팔아서 그 돈으로 생활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열 번 가까이 상품을 탄 것 같아요. 담배를 끊은 이유도 돈이 없어서였어요. 최악은 처음부터 돈이 없을 때가 아니라 있다가 없을 때라는 것도 처절하게 느꼈죠.”

-어릴 때도 형편이 어려웠다고 들었어요.

“저와 동생이 아주 어릴 때 집이 망해서, (기억의) 처음부터 가난했죠. (경기) 동두천에서도 가난한 동네, 그 동네에서도 제일 후진 집에서 살았어요. 가운데 조그만 마당이 있고 여섯 가구가 디귿자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단칸방이었죠. 아침에 늘 보는 풍경은 밖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에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었고요.”

‘별의 길’ 첫 파트는 아버지에 관한 시가 주를 이룬다. 그의 아버지는 2014년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 얘기를 생전에 거의 듣지 못했어요. 돌아가신 뒤에 들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아요. 아버지가 서울대 농대를 다녔다는 것만 알지 무슨 과인지도 몰라요.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의 ROTC(학군단) (임관) 반지를 끼세요. 친가 어르신들도 교육 잘 받고 좋은 학교 나온 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왜 형편이 어려워졌나요.

“아버지는 원래 사업을 했는데 잘됐대요. 그런데 보증을 잘못 서서 풍비박산이 난 거죠. 그러고선 중국집을 했는데 원재룟값이 폭등해서 그것마저 잘못된 거예요. 아빠는 그런 개인사를 얘기하질 않으셨어요. 그 뒤에 엄마가 돈을 벌러 나섰죠. 저는 손을 잡고 동생은 포대기에 싸서 업고 이태원 길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셨어요. 그러다가 도배 일을 배우신 거죠. 나중엔 아버지도 함께 하셨고요. 아버지는 서울대 나와서 사업하다가 도배 일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비참하게 느껴지셨던 것 같아요. 통 당신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세형씨에게 돈은 어떤 존재인가요.

“돈이 없을 때 구차해지는 저 자신을 봤죠. 자신감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의 돈은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다고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제게 돈은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도구죠.”

[실패란] 물 들어올 때 노 젓다가 부러진다

표제작 ‘별의 길’은 5년 전 그가 ‘집사부일체’에서 썼던 시다. 조명으로 만든 별의 길을 그가 걷고 있다. 최주연 기자

표제작 ‘별의 길’은 5년 전 그가 ‘집사부일체’에서 썼던 시다. 조명으로 만든 별의 길을 그가 걷고 있다. 최주연 기자

-시집 ‘별의 길’의 가장 큰 미덕은 ‘시는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렸다는 점 아닐까요.

“맞아요. 애초에 저는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시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코미디언이잖아요. ‘그런 나도 시를 쓰니 이렇게 좋아요. 여러분도 한번 해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시집이 나와서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표지가 어떤지, 뭐 이런 것도 보이지 않고요. 시집 한 권에 출판사 여러 직원들의 노력이 들어 있잖아요. 그분들의 고생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까 이 얇은 책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어요. 감사함의 크기였죠.”

-코미디가 아닌 방식으로 청중을 만난 건 북토크가 처음이죠.

“맞아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개그는 웃겨야 하는 일인데, 북토크는 웃기지 않아도 되는 자리잖아요. 평소 저를 보면 ‘웃겨주세요’라는 눈빛으로 보는 분들이 많은데, 북토크에선 ‘저도 할 얘기가 있어요’라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어요. 참 좋았죠.”

이연실 대표가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시집이 나오기 바로 전날이었다. 출판사로선 가장 바쁜 때다. 그런데 갑자기 양세형씨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용건은 “오늘 꼭 함께 밥을 먹자”는 것. 식사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을 이 대표에게 건넸다. “책이 나오면 이제 정말 바빠질 거예요. 독자들의 반응이나 판매량처럼 신경 써야 할 수치들도 많을 거고요. 어쩌면 오늘이 가장 설레고 행복한 날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감사함이 가득한 채로 꼭 맛있는 밥 한 끼를 함께 먹고 싶었어요.”

-유명해질수록 자기 중심이 되기 쉽잖아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건 타고났나요,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길러졌나요.

“제가 공부를 안 했잖아요. 그래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아는 사자성어가 몇 개 없다는 거예요. 열 개도 안 될걸요. 그래서 그 뜻은 다 알아요. 그중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참 좋았어요. 어릴 때부터 외웠으니까. 그렇게 살려고 노력도 했고요.”

-그래도 일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런 태도를 잊을 수도 있는데.

“제가 원래 뭐든 잘 잊어버려서 집에도 화이트 보드를 세 개 뒀어요.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그곳에 종류별로 적어 둬요. 스케줄부터 좋았던 얘기, 느낌, 기억하고 싶은 글귀 같은 것들. 그 전에는 포스트잇에 적어서 집안 곳곳에 붙였거든요. 그래서 온 벽이 포스트잇 천지일 때도 있었죠. 그렇게 노력하는 거예요, 잊지 않으려고.”

그의 시집에서 눈길이 머문 곳 중 하나는 저자 소개였다. 단 두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코미디언입니다. INFJ, INTJ 왔다갔다 합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출판사에선 애초 그가 시를 언제부터, 왜 썼는지 설명을 곁들여 좀 더 길게 쓰길 바랐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다 지우고 단 두 줄을 썼다. 궁금했다. 이토록 단출하게 자신을 소개한 이유가.

-저자 소개가 두 줄이라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쓴 이유가 있나요.

“제가 시를 썼다는 것에 주절주절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았어요. 글을 보고 평가해주시길 바랐죠.”

그는 시집의 인세 수익을 ‘등대장학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재심 전문으로 잘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를 TV 예능에서 만난 게 인연이 됐다. ‘등대장학회’는 살인범으로 몰려 21년 6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장동익씨가 이사장인 공익재단이다. 장씨와 같은 피해자들이 재심으로 누명을 벗고 국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과 손해배상금으로 재단 설립에 필요한 출연금을 마련했다. 이들의 사건을 맡은 게 박 변호사다. 양세형씨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기부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박준영 변호사님한테 ‘등대장학회’를 만들 거라는 얘기를 듣고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시집을 내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침 재단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들었죠. 잘됐다 싶었어요. 개인적인 후원 외에, 시집 수익도 이곳에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돈을 벌면 우선 내 주변 사람들부터 챙기고 싶었고 이제는 다행히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 됐어요. 그렇다면 이제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요. 제가 개그를 했잖아요. 어쩌면 개그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몰라요. 과거에 잘못 살았던 시간을 그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가 기부라고 생각해요.”

-글이란 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오, (코미디언인) 제가 처음 들어보는 좋은 질문! 하하. 글은 제가 해석하지 못하는 감정을 끄집어 내서 정리한 다음에 다시 (마음에) 넣을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에요.”

-양세형만의 언어로 ‘실패’를 정의한다면 뭘까요.

“실패는 ‘쉴 때’다. 실패를 했다는 건 일단 엄청나게 노력해서 도전했다는 의미잖아요. 굉장히 큰 에너지를 쓴 거죠. 그런데 실패했다고 해서 바로 뭘 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럼 과부하가 오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소파에 앉아 있거나, 혼자서 걷거나, 이런 시집(앞에 있던 ‘별의 길’을 집어 들며)을 좀 보기도 하면서 쉬어야 해요. 하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만 아는 고생이 있잖아요. 그렇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면, 일단 쉬고 재충전해야죠.”

-경험에서 나온 말 같아요.

“제가 승부욕이 강해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이죠. 노력해서 도전했는데 실패? 어, 안 되지. 다시 도전! 이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내 체력이나 정신력은 점점 떨어지는데 도전은 계속한 거죠. 그러다 보니 과부하가 와서 힘든 때가 있었어요. 번아웃을 겪기도 했고요. 사람들을 웃기는 게 좋아서 개그맨이 됐는데, 정작 나는 웃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간신히 샤워하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가서 잠은 차에서 자고요.”

-일을 엄청 많이 했던 때네요.

“방송을 10개쯤 할 때였죠. 사람들이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하던데, 신나게 노를 저었더니 노가 부러지더라고요. 그래도 배를 밀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기분이죠. 그때 들었던 생각이 이거예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보다 돛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겠구나. 그래야 노가 부러져도 바람의 힘으로 흘러가지.’ 그래서 돛을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에게 시는 심리적 돛 중 하나였을 테다.

-지금까지 해온 실패의 경험으로 얻은 삶의 도는 뭔가요.

“행복은 감사함의 크기다. 행복도 적응이 되면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려고 노력해요. 엄마가 아직도 도배 일을 하시거든요. 돈벌이로도 하시고, 봉사로도 하세요. 제가 가끔 따라가거든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엄마 일을 도우면 10만 원을 받아요. 새삼 돈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지죠. 방송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져요.”

그는 ‘별의 길’을 출간하면서 출판사에 미리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 대표의 전언이다.

“시집이 나오면 분명 안 좋은 눈길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무슨 코미디언이 시야’라는 얘기도 나올 수 있고요. 저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니 상처 받지 마세요. 제 시가 좋아 책을 내준 대표님이나 편집자님들이 그런 시선에 속상해할까 봐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 자체로 책을 만든 이들에게 심리적 묘약이 됐을 테다.

‘별의 길’ 서문엔 그의 수능 점수 얘기가 나온다. ‘88점’ 일화다. 고3 때 그는 애초 수능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마음을 고쳐먹은 건,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한 어머니 덕분이었다. 결과는 88점.

400점이 만점인 수능에서 88점을 맞았다고 인생도 88점인 건 아니다. 그의 시집이 증거가 아닐까. 그가 이 시집에 고이 담은 88편의 시는 수능에서 맞히지 못했으나, 인생에서 답을 찾은 312점의 승화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편집자주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김지은 버티컬콘텐츠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